
지난 14일 저녁 경기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공연 시작 전부터 뿌연 연기가 객석을 휘감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심장박동 같은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암전되지 않은 극장 뒤편에서 한 남자 무용수가 걸어 나왔다. 무언가에 홀린 듯 두리번대던 그가 무대에 오르자 20여 년간 유럽에서 줄곧 최정상 안무가의 자리를 지켜온 호페쉬 쉑터의 ‘꿈의 극장’이 비로소 시작됐다.
13명의 무용수는 강렬한 조명 아래 춤을 추며 무의식의 세계를 불러 세웠다. 사람이 꿈을 꾼다는 ‘렘수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기억의 편린을 이어붙인 듯한 구성이었다. 무용수들은 한데 모여 절도 있게 흐느적거리다가 어떤 순간에는 폭발하는 에너지에 휩싸여 격렬한 몸짓을 분출했다.
우리의 눈꺼풀이 열리고 닫히듯, 무대 중간과 뒤편에는 막들이 분주하게 열리고 닫혔다. 무대를 닫은 커다란 막의 가운데 하단. 엎드려 누운 한 남자가 이내 무대 안쪽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이 연상됐다.
공연이 절반쯤 지날 때 무대에는 빨강 슈트를 입은 3인조 밴드가 등장해 라이브로 몽환적인 음악을 연주했다. 이때까지 온몸의 공간을 울리던 강한 비트, 귓전을 때리던 큰 소리와 대비를 이루는 분위기였다. 자유롭고 폭발적이던 무용수의 춤도 마치 슬로 모션을 보는 듯한 움직임으로 전환됐다. 이윽고 희미하게 불이 켜지면서 무대와 객석이 환해졌다. 무용수들은 무대에서 바로 객석으로 걸어 내려와 관객과 손을 잡고 춤췄다. 어쩐지 이베리아반도에서 자주 접할 것 같은 멜로디가 라이브 밴드의 손과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듯한 착각을 깨뜨린 건 한 무용수가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객석에 외친 한마디 때문이었다. “다 함께 박수! 다 함께 춤춰요!”
뜨거운 박수갈채를 뒤로한 채 이날 저녁에는 호페쉬 쉑터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그는 “이미 공연을 봤기 때문에 어떤 메시지나 의도를 전달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각자가 느낀 대로 각자의 ‘꿈의 극장’을 가져갔으면 하는 바람이 느껴졌다. 자신의 모든 창작물에서도 그랬듯 쉑터는 이번 무대의 안무, 연출, 음악까지 직접 작곡했다. 이는 영화와 음악에도 두루 조예가 깊은 그의 재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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