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여개의 메스실린더가 천장까지 빼곡히 채워진 어둑한 실험실. 숨을 옥죄는 거친 고요함 속에서 유능한 의사이자 과학자인 남성은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사람에게서 선과 악을 분리하는 치료제를 손에 쥔 그는 '지금 이 순간' 내 모든 것을 걸고 세상과 맞서겠다며 최후의 선택에 나섰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명장면이다.
1888년 런던, 연인 엠마와의 결혼을 앞둔 헨리 지킬 박사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사람의 정신에서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있는 치료제를 개발했지만, 임상 실험 단계에서 이사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스스로 실험 대상이 되기로 하고 기꺼이 자기 팔에 치료제를 주사했다. 실험 결과는 성공. 헨리 지킬은 '선'을 나타내는 지킬 박사와 '악'을 대변하는 하이드로 분리됐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을 원작으로 하는 '지킬 앤 하이드'는 헨리 지킬이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인간의 선악 분리에 성공하고, 이후 두 인격이 대립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이내믹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무겁고 어두운 서사에 걸맞게 극은 전반적으로 무게감 있게 진행된다. 남 부러운 것 없는 사회적 지위를 지닌 헨리 지킬이 세상에 맞서고자 하는 이유, 엠마·루시 등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의 관계성, 개인이 겪는 치열한 내적 갈등 등이 모두 설명되어야 하는 탓에 초반에는 스토리의 중첩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얼기설기 얽혀 있는 타래는 헨리 지킬의 '중대한 결심'과 함께 단번에 통일성을 갖는다.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기 시작하면서 각 인물들과의 서사가 치밀하게 연결돼 전개되기 시작한다. 특히 치료제를 투여하기에 앞서 부르는 '지금 이 순간'은 '지킬 앤 하이드'를 보지 않은 이들마저 곡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히트 프러덕션 넘버(하이라이트 격의 넘버)로, 작품의 주된 흐름을 시의적절하게 환기한다.


2008년 첫 합류해 무려 다섯 번째 시즌에 참여하고 있는 홍광호는 폭발적이고 묵직한 가창으로 '지킬 앤 하이드'의 대명사다운 감동을 안긴다. 그가 고음을 지를 땐 귀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마저 방해물처럼 느껴져 순간 귀 뒤로 넘기게 된다. 해당 신에서는 절정의 무대 예술도 경험할 수 있다. 천장까지 높게 구현된 실험실에 가지런히 놓인 실린더가 찬란하게 빛을 내며 숨 막히는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이어 하이드로 변신하며 부르는 '트랜스포메이션(The Transformation)'에서는 절정의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다. 올곧고 깨끗하던 지킬의 목소리는 이내 걸걸하게 바뀌고 야수 같은 하이드가 등장하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상반된 두 인격은 결국 완벽한 분리가 아닌 '공존'이라는 혼돈을 맞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백미로 꼽히는 1인 2역 장면이 탄생했다. 하이드에게 잠식당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 지킬의 보컬로 시작하는 '컨프론테이션(The Confrontation)'에서는 한 명의 배우가 얼굴의 좌우를 나눠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며 각기 다른 목소리로 노래한다. 한쪽은 머리를 묶은 지킬, 다른 한쪽은 머리를 풀어 헤친 하이드의 모습으로 얼굴을 쉼 없이 바꾸고 목소리도 갈아 끼우는 고난도 연기를 숨을 죽이고 넋 놓고 보게 된다.
관람 내내 강력한 '카타르시스'가 살아 숨 쉬는 '지킬 앤 하이드'다. 국내 누적 관객 수 200만명을 돌파한 스테디셀러답게 강한 몰입감과 친숙하고 완성도 있는 넘버가 강점이다. 음악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만들었다.


한국 프로덕션은 1997년 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인 '지킬 앤 하이드'를 한국적 정서에 맞게 번안·수정·각색해 2004년 초연했다. 이후 20년간 아홉 시즌 내리 큰 사랑을 받으며 '한국 뮤지컬 최초 전회 매진·전회 기립박수', '1일 티켓 판매량 신기록(7시간 만에 1만2000장) 수립' 등의 기록을 썼다. 20주년 기념 공연인 이번 시즌에서도 '누적 관객 수 200만명 돌파' 기록을 추가하며 '가장 성공한 논레플리카 작품'이라는 명성을 이어가게 됐다.
지킬·하이드 역은 홍광호를 필두로 최근 전동석·김성철의 바통을 최재림·신성록이 이어받았다. 루시로는 윤공주와 함께 선민·김환희의 뒤를 이어받은 아이비·린아가 활약 중이며, 엠마 역에는 조정은·최수진·손지수에 이어 이지혜가 합류했다. 공연은 오는 5월 18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계속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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