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02일 10:21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최근 몇 년간 ESG 경영은 전 세계 기업들의 핵심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전방위적인 관심과 기대가 쏟아지던 시기를 지나며, 일부에서는 과도한 쏠림 현상이 ESG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ESG는 궁극적으로 기업의 제품 및 생산 과정이 친환경적이고, 경영형태가 사회적 규범에 준하는 프로세스를 준수하며, 의사결정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가치들이 기업 경영 전반에 자연스럽게 내재된다면, 굳이 ‘ESG’라는 용어를 별도로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ESG가 사라지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의미로 ESG가 사라지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ESG 경영에 대한 관심이 다소 주춤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한 산업계 대상 발표에서 ESG를 ‘음소거’의 약자인 E(음), S(소), G(거)에 빗대어 많은 기업 내부에서 ESG 용어가 활발히 언급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러한 표현이 적지 않은 공감을 얻었다.
특히 최근 기후변화 대응에 비교적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온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재집권하면서, 2017년 1기 집권때와 유사하게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의 행정명령에 또 다시 서명했고, 이에 따라 미국의 재탈퇴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이 국제 기조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기후변화 이슈를 포함한 ESG 경영이 이전처럼 빈번하게 다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국내외 많은 기업이 ESG 추진에 있어 속도조절론을 검토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ESG 규제를 선도적으로 추진해왔던 유럽도 EU 옴니버스 패키지를 통해 기존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 공급망실사지침(CSDDD), EU 택소노미(Taxonomy) 등의 대상 기업과 범위를 일부 축소하는 방향의 법안을 발표했다. 이는 권역 내 중견·중소기업의 공시 부담 및 규제 완화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해석되며, 대기업 및 글로벌 기업에는 여전히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유럽위원회(EC)의 신속 채택 제안에도 불구하고, 유럽의회(EP)와 각료이사회의 승인 과정에는 여전히 많은 혼란과 불확실성이 엿보인다.
하지만 최근의 표면적 현상만 보고 ESG의 미래를 단정 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과거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 미국이 파리 기후변화협정에서 탈퇴했을 당시, 다수의 미국 주정부와 기업 및 금융기관 약 2,300여 개가 참여한 ‘우리는 여전히 참여하고 있다(We Are Still In)’라는 민간 주도의 이니셔티브가 출범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의지를 드러냈으며, 지금도 여전히 활동 중이다. 이니셔티브에 참여하는 기업 및 기관들이 결합한 경제 규모는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32%에 달한다.
지난 미국 바이든 행정부 시절 글로벌 대형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전 세계 기업 경영자들에게 연례 서한을 보내, 세계 위기 상황에 자본시장의 역할과 책임을 환기시키며 ESG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 바 있다. 최근 미국 내 ESG가 정치의제화 되면서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조차 ESG 용어 사용을 자제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블랙록은 내부적으로 탈탄소화와 지속가능성 기반 투자 전략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실제로 블랙록이 최근 발표한 구체적인 탈탄소화 5대 투자지침은 ESG 원칙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ESG 투자는 전통적인 재무 중심의 투자 방식에서 진화하여, 환경적·사회적 요소를 고려한 지속가능한 투자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탈탄소 전략은 탄소를 과도하게 배출하는 산업에 대한 자금 유입을 제한함으로써, 탄소화된 경제 구조를 전환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탈석탄 관련 글로벌 기후분야 투자 규모는 2023년 기준 약 1조 5,500억 달러(2,272조 원)에 육박하며,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산업계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표면적 현상을 넘어, 그 이면에 담긴 구조적 변화와 본질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자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의 탄소국경세(CCA) 도입속도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 사례와 같이 인권 이슈 역시 정책적 대응 수단으로 적극 활용될 수 있으며, 미·중 간 패권 경쟁이 한층 가속화되면서 양 진영 간 갈등은 격화되고 있다. 이는 한국 산업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기존 공급망 체계가 최근의 국제 정세로 인해 어떻게 재편될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전략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후대응을 위한 넷제로 전략, 인권 보호를 위한 인적자본 관리 등 ESG는 이제 단순한 수사를 넘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장 논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 ESG는 단순히 규제 준수의 대상이 아니라,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브랜드 가치를 결정짓는 핵심 경쟁력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RE100과 과학 기반 감축 목표 이니셔티브(SBTi)에 가입하는 기업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관련 이니셔티브도 확대 및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규제 또는 제도적 의무 때문이 아니라, 공급망과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ESG를 요구하고 실천하려는 민간 기업들의 자발적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ESG는 이미 시장의 힘으로 굴러가고 있으며, 이를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것은 이제 기업의 선택에 달렸다.
완연한 봄을 맞이할 4월이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변화를 동반하는 계절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과거의 아픔과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ESG라는 단어가 상대적으로 언급 빈도가 줄어들고 규제와 관심도 일시적으로 감소한 듯 보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시기야말로 ESG의 진정성과 본질을 되돌아보며 전략적으로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 산업계가 ESG의 ‘또 다른 봄’을 준비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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