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에서 '로비'까지 딱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돌이켜보니 제가 감독으로서 노선을 정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영화를 내놓는다는 건 부담되고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그만큼 가슴 뛰고 신나는 일입니다."배우 하정우가 감독 하정우로 돌아왔다. 4월 2일 개봉한 영화 '로비'를 통해서다. 태생이 '웃수저'인 그가 전매특허인 말맛 나는 코미디로 올봄 관객의 배꼽 사냥에 나섰다.
'로비'는 연구밖에 모르던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이 4조 원의 국책 사업을 따내기 위해 인생 첫 로비 골프를 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하정우는 2020년 코로나19가 확산할 당시 뒤늦게 시작한 골프에서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골프는 '인격과도 연결되는 스포츠'였다.
"단순한 게임이나 다른 스포츠와 다르더라고요. 골프 잘 치는 날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망한 날은 저 자신이 너무 비참해졌어요. 이게 도대체 뭘까, 의문을 갖기 시작했죠. 동반자들을 보니 골프장 밖에서 온순하고 얌전했던 사람이 골프채만 들면 이상하게 변하더라고요. '저 정도 인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속물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그 사람의 '똥꼬',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죠. 아이러니한 게 블랙코미디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이른바 '골린이'(골프+어린이)지만 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은 창욱이 접대 골프의 세계에 어떻게 발을 들여놓게 되는지,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바꿀 첫 라운딩을 어떻게 성사시킬지 그 과정을 그린다. 대한민국에 뿌리내린 지 이미 수십 년이 넘는 스포츠인 골프와 골프장의 이면엔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골프 로비의 세계가 실제 존재하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엿볼 수 있다는 지점이 흥미롭다.
"골프장에서 아침에 만나면 다 몸이 안 좋다며 밑밥을 깔고 시작해요. 100원짜리 내기라도 해야 재밌어 하고, 정말 목숨을 걸어요. 중간에 골프백 들고 집에 가는 분도 봤어요. 화려하고 고급진 골프장에서 어린애들 자치기하는 것처럼 네다섯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 웃긴 거죠. 이걸 영화 소재로 써야겠다! 싶었죠."
'로비'는 창욱을 중심으로 그 사이사이 접대를 받는 국토교통부 실세 최실장(김의성), 조 장관(강말금), 인기 배우 마태수(최시원), 프로골퍼 진프로(강해림), 비리부장 박기자(이동휘) 등 알록달록한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꾸민다.
"제가 연예인이다 보니 형들이 골프에 초대하면 꼭 모르는 사람 한둘이 껴있어요. 처음엔 '하 배우' 이러다가 한두시간 지나면 사진 찍고, 영상 찍고 선을 조금씩 넘더라고요. 말도 놓고 지내다 보면 관계가 이상해져요. 되게 좋았던 적도, 불편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로비'에 연예인이 한명 들어와야겠다 싶더라고요. 고등학교 동창 중 공무원 친구가 있는데 골프장에 갈 때 네임택에 꼭 아들 이름을 쓰더라고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공무원은 골프장에 있으면 안 된다며 조심스러워하더라고요. 평상시엔 만나지도 않을 것 같은데 광활하고 프라이빗 한 골프장에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섞이는 거죠."

하정우는 앞서 최 실장 역의 김의성이 이번 작품을 통해 '재발견' 될 것이라고 했다. 김의성은 청렴하다고 소문난 공무원이지만 진프로의 열렬한 팬이라 함께 골프를 치다가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비호감 '개저씨' 최 실장 역을 연기했다. 그는 "결과를 보니 너무 더럽고, 비호감이었다"고 고백했다.
하정우는 최 실장 캐릭터에 대해 "남자들은 아동틱한 부분이 있다. 아동심리학은 있지만 남성 심리학은 없는 것처럼 어디를 가든 수컷, 우두머리 기질을 잃지 않는 거다. 그리고 어느 자리에 가도 자신이 나이스한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려 하는데 그게 너무 웃기더라"고 말했다.
"낭만을 잃지 않으려 하는 형들을 보면, 그 자리에 20, 30대가 있어요. 아버지뻘인 사람이 남자로서 어필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최 실장이 그런 인물이면 재밌겠다 싶어 빌런 아닌 빌런을 만들었죠. 김의성 형은 나이를 막론하고 격 없이 잘 어울리는 분이시라 최 실장처럼 막힌 캐릭터를 잘 표현하실 거라고 생각했죠."
최시원이 연기한 마태수는 배우 최민수가 모델이었다. 그는 "인터뷰 때 최민수 선배가 썼던 어록들을 연출부들과 쭉 정리했다"며 "'호랑이의 울분을 가진 사슴'이란 대사가 있는데 실제로 최민수 선배가 한 말"이라고 했다.
이어 "인물 별로 나눠서 이 사람이 얘기할 만한 대사들을 만들었다. 우디 앨런 영화를 좋아해서 참고하기도 하고 '대부'의 대사들을 펼쳐놓고 변형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든 시나리오를 배우들에게 주고 여러 번 리딩하는 작업을 걸쳤다"고 설명했다.

하정우는 출연한 작품들의 누적 관객 수가 1억 명을 돌파해 '최연소 1억 배우'에 등극했지만, 최근 출연한 작품들은 안타깝게 흥행에 실패했다. '클로젯', '비공식작전', '1947보스톤', '하이재킹', '브로큰'까지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또 감독으로서 '롤러코스터'(2013)를 내놓으며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지만 이후 300억 원을 들인 '허삼관'이 누적 관객 수 98만 명에 그치며 아픔을 곱씹어야 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세 번째 연출작 '로비'를 내놨다. 그는 "내가 잘 아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심경의 변화를 밝혔다.
"'허삼관' 개봉한 후 파파라치 언론사 이야기를 그린 '서울 타임즈'란 작품을 개발했어요. 내가 기자도 아니고 들은 이야기를 흥미로워서 쓴 건데 이래도 되나 싶었죠. '허삼관'도 내가 재밌다고 생각한 소설을 그린 건데 '이게 맞나' 싶더라고요. 물론 원작을 영화화하는 걸 잘 하는 감독도 있지만 저는 딱 찜찜하게 막히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것, 경험해 본 것을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하정우는 "두 번 연출하고 나서 연출자로서 좀 더 신중해진 것 같다"며 "배우로 현장 경험하며 다른 감독의 현장을 보고 배우고 고민하고 담금질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고 말했다.

'롤러코스터'에 이어 블랙코미디 장르로 돌아온 데 대해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신나는 것 같다"며 취향을 고백했다.
"어떤 사람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볼 때 범죄 스릴러로 보지만 제겐 블랙코미디로 보여요. 어떤 감독은 '넌 연기를 좀 덜 하는 것 같아. 표현을 좀 친절하게 해줘'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게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신나고, 가슴 뛰는 영화들이 있다 보니 그런 영화를 관심 갖게 되고 만들게 됐어요. 무심한데 툭툭, 그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블랙코미디 장르는 풍자적인 메시지를 내포하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색다른 웃음을 줄 수 있어야 하므로 대중의 평가 기준이 높다. 유머 코드에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한 영화가 모든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정우는 정했다. 블랙코미디로.
"네 번째 작품 '윗집사람들'(가제) 역시 블랙코미디입니다. 제 연출작 중 '롤러코스터'가 언급이 많이 되는 데 앞으로도 이런 색의 영화를 만들게 될 것 같아요. 지금은 투배사에서 원하는 옵션들도 있기 때문에 출연도 하고 감독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연출자로서 올곧이 네임드가 생긴다면 연출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출만 해보는 것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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