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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길인가"…10명의 이자람과 떠난 러시아 설원 여행

입력 2025-04-08 17:26   수정 2025-04-09 00:55


“여러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부채를 활짝 펴서 흔들면 눈보라 소리 좀 같이 해주실 수 있나요? 한번 해볼까요?”

지난 7일 소리꾼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이 첫 막을 올렸다. 검은 개량한복을 입고 무대에 나타난 이자람이 새하얀 부채를 펼쳐 들자 관객은 입으로 ‘쉬~’라는 소리를 내뱉으며 힘껏 호응했다. 벚꽃이 흩날리는 4월 초임에도 관객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영하 28도 러시아의 드넓은 눈밭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자람이 ‘노인과 바다’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눈, 눈, 눈은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주인과 하인>을 판소리 말맛을 살려 각색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원작을 따른다. 배경은 1800년대 크리스마스 주간의 한 러시아 농가. 머릿속은 오로지 돈으로 가득한 주인 바실리와 그를 묵묵히 따르는 하인 니키타가 고랴츠키노숲을 매입하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눈밭을 헤매는 여정을 통해 우리가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눈, 눈, 눈은 바실리의 행동과 심리를 깊이 파고든다. 마을 이장 격인 바실리는 숲을 사기 위해 험악한 날씨에도 발길을 재촉한다. 기력이 다한 애마 제티가 고꾸라져도 고삐를 놓지 않는다. 그러다 완전히 길을 잃고선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런 바실리를 보며 ‘쉬었다 갔으면 어땠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이자람의 탁월한 판소리와 함께 관객에게 전해진다.

이자람은 이번에도 ‘천의 목소리’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극의 내용을 설명하는 해설자에 더해 바실리, 바실리 부인 아나스타샤, 니키타, 눈밭에서 만난 농부들 등 10명 이상(말과 개 포함)을 연기하면서다. 말 제티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눈보라 소리 등 의성어와 의태어도 기가 막히게 표현하며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전작 노인과 바다에선 노인 산티아고가 청새치를 낚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제티가 당근을 “꼬득꼬득” “아드득아드득” 씹어 먹는 소리를 오로지 입으로만 구현하며 탁월한 능력을 입증했다.

무대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소품 하나 없이 텅 빈 무대에는 새까만 배경과 극적 대비를 이루는 흰 연기가 가득 찼다. 눈보라를 형상화한 연기는 극의 내용에 따라 바닥에 스윽 깔리거나 천장에서 쏟아지는 등 다채롭게 연출됐다. 이번 대본을 직접 쓴 이자람은 극 중 인물이나 해설자가 아니라 작가 이자람으로 목소리를 바꿔 관객이 낯설게 느낄 수 있는 러시아 단어와 문화를 친절히 설명하기도 했다. 판소리 문턱을 낮추려는 그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었다.

이준형 고수와도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다. 그는 “그렇지” “얼씨구” “좋다” 등 추임새를 적절히 넣어주며 이자람에게 흥을 불어넣었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관객도 후반부로 갈수록 추임새로 호응하며 무대에 몰입했다.

눈, 눈, 눈은 오늘날 한국과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임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힌다. 부를 쌓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어쩌면 불안을 떨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극 중 바실리와 겹쳐지며 서늘한 울림을 준다.

이자람은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기 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고, 지구가 살면 얼마나 살꼬. 세상 벗님들아, 지난 시간도 다가올 시간도 툭툭 털어버리고. 어떠냐 아~ 하는 마음으로 맛있는 것, 좋은 것 찾아다니며 살아보세.”

눈, 눈, 눈은 오는 13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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