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시집가면 꼭 그림 한 점 선물로 줄게.”
60년쯤 된 얘기다. 화가 박수근(1914~1965)은 서울 소공동 반도화랑에 들를 때면 이곳에서 일하던 딸뻘의 직원 ‘미스 박’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그림값 받아 술 한잔 걸치러 가기 전에 던지는, 그런 기약 없는 공치사라기엔 퍽 다정하면서 믿음직한 한마디였다. 결혼생활의 안녕을 바라는 의미겠지만 언젠가 화상(畵商)으로 기반을 다질 밑천을 마련해주겠다는 선물 같았다.

박수근이 세상을 뜬 이듬해, 약속대로 화랑 아가씨는 결혼식장에서 굴비 두 마리가 그려진 회화 한 점을 품에 안았다. 박수근의 부인 김복순 여사가 보따리에서 꺼낸 1962년 작 ‘굴비’였다. 그 시절 가난했던 밥상에 그림으로나마 귀한 생선 맛을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을 유화는 소박하면서도 생생한 필치가 돋보이는 박수근다운 그림이었다. 몇 년 뒤 자신의 화랑을 꾸려 ‘박 사장’이 된 이 화랑 아가씨의 이름은 박명자(82). 훗날 한국 화랑계의 대모로 이름을 날린 1세대 갤러리스트다.가보지 않을 길을 걷게 된 데엔 화가들의 도움이 컸다. 여류화가인 우향 박래현(1920~1976)이 화랑을 열라고 격려했다. “해외에선 여성 갤러리스트들이 미술계를 주름잡는다”며 우리도 이런 흐름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만 해도 잘 팔리지 않던 자신의 그림 대신 남편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작품으로 전시를 열 수 있게 해줬다. 풍곡 성재휴(1915~1996)는 ‘현대’라는 이름을 지었고, 천경자(1924~2015)는 ‘하와이 가는 길’을 개관 선물로 들고 왔다.
시대를 읽는 갤러리스트의 안목도 상업화랑 전성기의 물꼬를 텄다. 인사동엔 고미술상과 표구상이 즐비했고, 동양화를 높게 쳐주던 당시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서양화에 주목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생활양식이 바뀌면 취향도 바뀌기 마련이기 때문. 1976년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지어지며 한옥에서 양옥으로 주거문화가 달라지자 미술의 흐름도 방향을 틀었다. 서양식 아파트엔 사군자, 서예보다는 서양화가 어울렸다. 이런 흐름과 맞물려 서울대와 홍익대 미대 등에서 재능 있는 서양화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1970년대엔 ‘동양화는 사는 것, 서양화는 선물 받는 것’이란 인식이 컸다”며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고 화단의 동향도 서양화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을 파악하고 이중섭, 박수근 등 대중적 사랑을 받게 된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 게 반세기 넘게 화랑을 유지하는 밑바탕이 됐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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