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퇴직 사유'를 '권고사직'으로 바꿔 달라며 회사를 찾아오는 근로자들로 골머리를 앓는 인사담당자들이 적지 않다. 이 경우 정부 지원금을 박탈당하는 등 불이익을 입거나 실업급여 부정수급 방조로 몰리는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므로 변경에 신중해야 하며, 퇴직 사유 자체를 명확히 해놔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4월 A 병원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고용보험 피보험자격 상실사유 정정처분 취소' 소송에서 병원 측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사직서 제출을 열흘 정도 미루던 B는 간호 이사에게 전화해 "산재 처리 때문에 (사직을) 기다렸다. 골치 아프게 해 죄송하다. (정식으로) 사직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병원도 다음날 근로복지공단에 '개인 사정으로 인한 자진 퇴사'로 퇴사 사유로 B의 고용보험 피보험자격 상실을 신고했다. 이듬해 1월에는 B가 아예 병원을 방문해 '개인적 사유로 사직한다'고 사직서까지 작성했다. B는 산재도 승인돼 요양급여를 받게 됐다.
그런데 10개월 뒤인 2021년 9월, 갑자기 병원을 찾아 "자진 퇴사에서 권고사직으로 정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상실 사유가 권고 사직으로 정정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B는 "만약에 병원에 (상실 사유 정정을 이유로) 과태료 300만원이 나오면 내가 부담하겠다"고까지 얘기했다.
하지만 병원이 이를 거부하자 B는 한 달 뒤 공단을 찾아 "자격상실 사유를 권고사직으로 바꿔달라"며 피보험자격 상실사유 정정을 신청했다. 공단이 이를 받아들이고 퇴사 사유를 정정하자 회사가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상실사유 정정'이란 근로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고용보험 자격상실 사유를 정정해달라 요청하는 제도로, 사업주의 착오 등으로 잘못 신고된 경우 주로 쓰인다.
법정에서 공단은 정정이 정당다고 주장했다. B도 재판에서 말을 바꿔 "병원이 퇴사를 독촉하고 전화해서 마지못해 사직서를 냈다"고 주장했다.
또 공단은 "(근로자의 요청을 공단이 들어준) 정정처분 자체는 사업주의 구체적인 권리·의무에 직접 변동을 초래하지 않는다"며 제3자인 병원은 정정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할 자격(원고적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원고적격이 없다는 주장도 일축했다. 재판부는 "병원은 2020년 60세 이상 고령자 고용지원금을 신청해 지급받았다"며 "B의 상실 사유가 ’경영상 이유에 따른 권고사직’으로 정정되면 고령자 고용지원금을 신청한 후 6개월 이내에 55세 이상의 근로자를 고용조정으로 이직시킨 경우에 해당해 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병원에 원고적격이 없다고 볼 경우 병원이 고용지원금 반환 처분을 받으면 그 취소판결을 (따로) 해야 하는 등 법률관계가 복잡해진다"며 "법적 분쟁을 조기에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법치 행정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고용보험 자격 상실 사유 정정은 근로자들이 억울하게 실업급여 인정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 구제 수단으로 쓰인다. 다만 자발적 사직 이후 변심한 근로자들이 악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상실 사유 정정은 근로자가 공단에 증거 자료를 내고 신청하는 절차라, 공단이 직접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연락을 취하고 조치한다. 근로자가 아닌 공단과 분쟁을 하는 모양새라 인사담당자들 입장에선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23년 근로복지공단에 상실 사유 정정으로 접수된 건은 3253건이며 이중 주장이 받아들여진 건수는 2090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상실사유를 함부로 정정해 줄 경우 회사가 불이익을 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고용 장려금, 일자리 안정자금 등 정부 지원금은 고용의 '지속성'을 지급 조건으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노무사는 "상실신고 한두 건을 정정해준다고 고용보험료가 오르지는 않는다"면서도 "고용보험 상실신고가 너무 많아질 경우 '고용유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지원금 수급에 제한을 받을 수 있으며, 온정주의적 이유로 변경을 해주는 것도 엄연한 부정수급 방조"라고 설명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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