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배터리 소재 시장이 중국판이 된 것은 ‘넘사벽 가성비’ 탓이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규모의 경제를 이룬 중국 배터리 소재 기업은 국내 기업보다 20~30% 저렴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싹쓸이하고 있다.
국내 배터리셀 업체조차 중국 소재 비중을 늘리고 있다. 국내 배터리 1위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중국 양극재 기업 창저우리위안에서 공급받는 양극재를 16만t에서 26만t으로 늘리기로 했다. 삼성SDI도 최근 중국 분리막 기업 시니어에서 분리막을 공급받기 시작했다. 2030년까지 계약한 물량은 22억㎡로, 전기차 300만 대에 들어가는 규모다. 삼성SDI는 그동안 국내에 공장을 둔 WCP에서 분리막을 공급받았다.
SK온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에코프로비엠과 엘앤에프에서 양극재를 조달해온 이 회사는 올해부터 중국 양극재 기업 당성커지를 파트너로 잡았다. 2028년까지 3조원어치가 넘는 12만7000t 물량을 공급받기로 했다. SK온은 저렴한 중국산 양극재를 넣은 배터리를 중국 지리자동차 등에 납품할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국내 배터리 소재 산업이 붕괴하면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통제로 벌어진 사태가 배터리 분야에서 재연될 수 있다”며 “국내 배터리 소재 공급망이 무너지지 않도록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분리막을 제조하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501억원 흑자→2910억원 적자), 전해액을 생산하는 엔켐(30억원 흑자→653억원 적자), 동박 제조업체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118억원 흑자→644억원 적자), 전구체 기업 에코프로머티리얼즈(87억원 흑자→647억원 적자)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배터리셀사들의 중국 기업 선택이 개별 기업 문제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국과 치열한 가격 경쟁이 벌이는 상황에서 배터리 생산비용을 낮추려면 중국 공급망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국내 배터리셀사 역시 CATL 등과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 배터리 소재 업체 관계자는 “국내 셀 업체들이 비용을 낮추기 위해 소재는 물론 배터리에 들어가는 작은 부품도 검증받은 중국산으로 바꾸고 있다”며 “생존 경쟁에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제품의 국적을 따질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값싼 전기료와 인건비 등의 영향도 크다. 산업 전기료는 한국이 중국보다 60~70% 이상 비싸다. 인건비는 두 배 이상이다. 중국 노동자들은 1주일에 특근을 가득 채워 일하고도 월 200만원 이하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소재업체는 중국의 이 같은 경쟁력에 맞설 정책 지원이나 환경적 이점이 거의 없다.
배터리 공급망의 부실은 경제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2차전지는 반도체 등에 이어 국내 산업의 최대 미래 먹거리다. 하지만 배터리 밸류체인이 무너지면 극단적으로 말해 중국이 소재 하나만 통제해도 국내 배터리업체 전체를 흔드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생산 및 구매 보조금 등을 검토해야 할 단계라고 강조한다. 미국, 중국, 일본은 이미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소재 생산비의 일부를 보조금으로 지급하거나 자국 내 셀업체가 자국 소재를 구매할 때 구매 보조금을 지급하는 식이다.
투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적극적인 투자세액공제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지난해 7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투자세액공제 제도를 본떠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투자 비용 일부를 현금으로 환급해주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하지만 현재까지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셀사와 달리 소재업체들은 내구력이 약해 현금 고갈이 투자에 미치는 악영향이 더 크다”며 “산업 정책 부재로 중국과 격차가 벌어지면 나중에는 따라가지도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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