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방이 아니라 주(州)가 회사법을 관할하는 미국에선 수십 년 전부터 기업 유치를 위해 주 간 회사법 경쟁을 벌여왔다. 이 경쟁 구도에서 델라웨어주는 기업 친화적인 판례법과 유연한 기업 환경을 앞세워 승자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S&P500 기업의 약 64%가 델라웨어에 등록·설립돼 있을 정도다.
그러나 최근 델라웨어 법원이 소수주주 보호에 중점을 둔 판결들을 내리면서 기업의 불만이 커지자 텍사스주가 이런 틈새를 공략했다. 텍사스는 델라웨어보다 더 기업 친화적인 회사법을 제정해 기업 이전을 유도하는 전략을 택했다. 텍사스 의회는 이달 7일 ‘상원법안 29호(SB 29)’를 통과시켰으며, 그레그 애벗 주지사가 14일 서명함으로써 즉시 시행에 들어갔다. 이 법안은 텍사스를 ‘기업 설립 선호 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의 일환이다.
텍사스 법안의 핵심은 ‘경영판단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의 성문화다. 이 원칙은 텍사스 기업의 이사와 임원은 △선의로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회사 이익을 위해 △법과 회사 규정을 준수하며 행동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이사와 임원에 대한 소송 제기 요건을 대폭 강화해 불필요한 소송을 막는 역할을 할 전망이다.
특히 텍사스 상원법안 29호는 회사 임원으로 보호 범위를 확대하고, 델라웨어와 달리 ‘중대한 과실’만으로는 주의의무 위반이 인정되지 않도록 했다. 또 주주대표소송도 상장기업은 3% 이상 지분을 확보해야 가능하도록 했다.
‘상원법안 21호(SB 21)’로 불리는 이 개정안의 핵심은 지배주주 관련 거래에 적용되는 ‘세이프 하버(Safe Harbor)’ 규정 신설이었다.
개정법은 상장폐지(Going Private) 거래를 제외한 일반적인 지배주주 거래에서는 ‘독립 위원회 과반수 승인’ 또는 ‘소수주주 과반수 동의’ 중 하나만 충족해도 경영판단 원칙이 적용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법원이 이사의 결정을 심사할 때 더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도록 해 경영진 책임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다. 델라웨어 대법원은 지난해 4월 ‘매치그룹 사건’에서 두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이런 엄격한 기준을 입법을 통해 완화한 것이다.
개정법은 또 주주의 회사 정보 열람권에 제한을 두고, 이메일이나 개인적 통신 내용을 열람 대상에서 제외했다. 아울러 이사의 독립성 판단 기준과 ‘지배주주’의 정의를 명확히 해 법적 분쟁 소지도 줄였다.
델라웨어가 기업 친화적으로 선회한 배경에는 ‘기업 이탈’을 막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델라웨어 대법원의 매치그룹 판결 이후 테슬라, 드롭박스 등 주요 기업이 텍사스, 네바다 등 규제가 덜한 주로 본사 이전을 추진하는 현상이 확산했기 때문이다.
텍사스·델라웨어와 한국의 상반된 움직임은 각국 법체계 차이에서 비롯한다. 법무부 법무실장을 지낸 구상엽 변호사는 “미국은 주 간 경쟁으로 기업 친화적 방향으로 돌아선 반면 한국은 단일 회사법 체계에서 주주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델라웨어와 텍사스의 법 개정은 이사회와 지배주주에게 더 넓은 재량권을 부여하고 인수합병(M&A) 거래 유연성을 크게 증대시킬 것”이라며 “한국에서도 상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이사 충실의무 확대와 동시에 경영 효율성을 저해하지 않도록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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