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가 청계천 거리를 산보한다. 노란 봄빛이 흘러내리는 낮은 기와지붕이 어깨를 기댄 골목을 느릿느릿 걸어간다. 생각은 흩어지고, 시간은 제 갈 길을 갔다. 2025년 어느 날 구보씨는 이제 ‘산보’하지 않고 ‘산책’한다.지난겨울 ‘계몽령’은 망상으로 끝났지만 우리말 계몽은 아직 안 끝났다. 웬 철 지난 계몽 타령이냐고. 미몽에 빠진 사람이 많은 탓이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사업부 명칭을 고객 혼란을 이유로 한글 ‘파운드리’를 사용하지 말고 영어 ‘Foundry’만 쓰라고 지침을 내릴 정도다.
한국인에겐 일본이라는 트라우마가 있다. 두 번이나 크게 당했고,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산보를 산책으로 바꾸고 ‘벤또’를 ‘도시락’으로 대체했지만 남은 찌꺼기가 산더미다. 게다가 ‘야마’(やま·山·핵심)처럼 목숨줄이 질기다. 신문사에서조차 “야마가 뭐냐고!”란 말이 여태 들린다.
계몽은 때로 실패했다. 일본어는 일상어뿐만 아니라 행정, 법률, 산업 용어 등에서 여전히 위력을 뽐내고 있다. 법제처가 1985년부터 법률 용어 순화 운동을 추진하는 등 일본어 잔재 걷어내기에 힘을 쏟았지만 실생활에는 뿌리내리지 못했다. ‘소구력’(訴求力)은 국어사전에 없지만 여전히 식자층을 사로잡고, ‘기부채납’은 ‘공공기여’와 쟁투를 벌이고 있다.
왜 이리 고단할까 우리말은. 일본어에 가위눌리고, 영어에 치이고…. 다듬은 말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까닭은 낯설어서다. 배우 차은우처럼 잘생긴 사람이야 단박에 마음이 끌리겠지만 첫 만남은 낯설다. 대부분 지레 외면한다. 그러나 괴랄하게 디자인한 신차도 자꾸 보면 괜찮다. 새로운 언어의 생존은 얼마나 많이 사용자에게 노출되는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찰떡맞춤 다듬은 말이라면 생존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계몽은 어렵다. 그러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1970년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는 가파른 인구절벽까지 불렀다. 배경에는 정부와 시민단체 그리고 언론의 광범위한 계몽이 있었다. 우리말 계몽도 매한가지다. 그 등짐은 오롯이 우리 자신이 져야 한다. 대한국인이 우리말을 잘 벼리지 않으면 누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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