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자본시장에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새로운 의결권 자문사가 등장해 주목받고 있다. 지난 2월 출범한 ‘한국의결권자문’은 정석호 전 한국IR협의회장(대표)을 중심으로, 장윤제 전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민간전문가(부대표), 신현한 연세대 교수(자문위원장) 등 학계와 업계의 지배구조 전문가들이 함께 설립한 국내 독립형 의결권 자문사다.
한국의결권자문은 기존 자문사의 ‘사후 대응’에서 벗어나 ‘전략형 협력자’를 지향한다. 이들은 첫 사례로 고려아연 주주총회에서 최윤범 회장 측 안건에 ‘찬성 권고’를 제시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의결권 자문을 단순한 가결·부결 판단이 아닌 기업과 주주 간 전략적 대화의 장으로 확장하겠다는 철학을 반영한 행보다.
한국의결권자문은 주주총회 의안 분석·작성 자문, 주주와의 소통 지원은 물론 이사회 운영 개선, ESG 대응 체계 구축, 조직 재편,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전략 제안까지 자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신현한 교수는 “의결권 자문은 치료가 아닌 예방의 영역”이라며 “경영 리스크를 사전 관리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정석호 대표는 “ESG는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며 “의결권 자문사는 단기적 감시자가 아닌 기업의 장기 가치 성장을 돕는 전략적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장윤제 부대표는 “ESG 원론도 결국 변화하는 시장에서 리스크와 기회를 포착해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다”며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IR이 밸류업 출발점
한국의결권자문은 기업의 IR(투자자 커뮤니케이션)을 밸류업의 출발점으로 본다. 정 대표는 “많은 상장사들이 여전히 IR을 의무로만 여기고 있다”며 “문화적·제도적으로 소통을 유도할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한국 기업들은 조용히 잘하고 있지만 소통을 꺼리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시장과의 신뢰 형성이 어렵다. 지배구조·투명성·성장성 중 투명성이 가장 중요하며 이는 곧 적극적인 소통으로 실현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의결권자문은 향후 상장 기업의 자발적 IR 활동을 유도하고 장기 투자자와의 전략적 소통을 지원하는 ‘성장 중심 자문’으로 기능을 확대할 방침이다. 정 대표는 “IR은 단기 주가 방어가 아닌 기업의 성장 전략을 외부에 알리고 투자 신뢰를 쌓는 과정”이라며 “상장 후 일정 기간 IR를 의무화하는 제도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감시자에서 설계자로…의결권 자문의 진화
기존 자문사들이 ‘찬반 권고’에 초점을 맞췄다면, 한국의결권자문은 기업 맞춤형 전략을 제안하는 전략적 파트너를 지향한다. 신 교수는 “오너 경영인이 내부에서 듣지 못하는 솔직한 조언을 우리가 해줄 수 있다”며, “외부 자문사의 독립성과 객관성이 바로 그 가치”라고 강조했다. 장 부대표는 “일본이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를 ‘관여’가 아닌 ‘대화’로 번역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해관계자 간 협력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그는 “행동주의와 방어주의를 넘어, 주주와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성장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전략팀과 IR팀 간의 유기적인 협업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앞으로는 방어 중심 자문에서 벗어나, 성장을 주도하는 자문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 ESG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는 발언의 배경은
(신현한 교수) “ESG는 이제 전제 조건이지, 목표가 아니다. 탄소 배출처럼 규제나 산업 구조로 인해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요소를 ESG 평가에 포함시키는 건 현실적 한계가 있다. 기업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은 ‘G(거버넌스)’이며 이 영역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설계하느냐가 결국 ESG를 넘어 기업가치에서의 성과로 이어진다. 투자자들이 진짜 원하는 건 ‘가치를 올리는 기업’이며, ESG는 그 수단일 뿐이다. 이제는 ‘착한 기업’보다 ‘잘 되는 기업’이 필요한 시대다.”
(장윤제 부대표) “ESG의 원래 목적은 리스크 대응이었다. 사회와 시장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간과했던 리스크와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 ESG의 출발점이었다. 밸류업은 ESG를 통해 이뤄지는 게 아니라 ESG를 포함한 전략적 경영의 결과물이다. ESG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며, 우리가 이를 ‘전략 자문’으로 풀어내겠다는 의미다.”
- 기존 의결권 자문사와 가장 큰 차별점은
(정석호 대표) “우리는 단순한 가결·부결 자문에서 벗어날 것이다. 한국의결권자문은 기존 자문사의 사후적 대응 방식을 넘어, 이사회 운영, ESG 전략 수립, 조직 개편 등 기업 내재 가치를 높이는 선제적 자문을 제공한다. 주총 안건 분석에 그치지 않고 기업의 전략 파트너로서 기능하겠다는 게 가장 큰 차이다. 또한 독립성과 집단지성이 우리 강점이다. 우리는 외부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구조 속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문위원회 형태로 참여해 객관적이고 창의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집단지성을 바탕으로 한 독립 자문사로서, 국내 자본시장 내에서 차별화된 역할을 할 수 있다.”
- IR이 밸류업의 출발점인가
(정석호) “많은 기업이 여전히 IR을 의무로만 여기고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소통하지 않으면 투자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업으로 인식한다. 기업의 전략을 명확히 알리고 설득하는 것, 그것이 IR의 본질이다. 최근 IR을 강화하여 투자자의 신뢰를 높여가고 있는 유한양행을 하나의 사례로 들 수 있겠다. 기업의 소통 태도 하나로 투자자 신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IR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주주의 이해를 얻는 투자다.”
(신현한) “IR은 밸류업 3요소 중 ‘투명성’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지배구조와 성장성이 확보되어도 이를 외부에 설명하지 못하면 시장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기업들이 IR을 꺼리는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도 많은 대기업이 언론 노출을 꺼린다. 하지만 기업이 어떤 전략을 갖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려는지를 외부에 알리지 않으면 시장은 기업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소통은 신뢰를 형성하는 시작점이다.”
- 행동주의 투자자 대응은 어떻게 진화하고 있나
(장윤제) “주주행동주의 대응도 시대에 따라 진화하고 있다. 과거 1단계는 주주 요구에 단순 대응하는 방식이었고, 2단계는 주요 주주의 의결권 행사 지침을 반영해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3단계, 즉 기업이 먼저 성장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주주에게 설득하는 ‘주도적 대응’이다. IR팀과 전략팀이 일관된 메시지를 통해 주주를 이끌어가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끌려다니는 기업이 아니라, 성장 로드맵으로 투자자 신뢰를 선도하는 기업이 돼야 한다.”
- 의결권 자문사의 역할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나
(신현한) “우리는 오너에게도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외부 입’이다. 전문경영인이 오너에게 직접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독립적인 외부 자문사가 전달해줄 수 있다. 특히 승계나 지배구조 문제처럼 민감한 사안에 대해 기업의 ‘맏형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장윤제) “ESG, 승계, 조직 재편과 같은 이슈는 단순한 찬반을 넘어서는 깊이 있는 통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기업가치 관점에서 소통과 대화를 조율함으로써, 기업과 투자자가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정석호) “우리는 전략적 자문기관으로 진화하고자 한다. 단순히 안건을 가결하느냐 부결하느냐의 프레임이 아니라,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투자자 관계를 설계하는 컨설팅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곧 ‘전략적 의결권 자문’의 시작이다.”
이승균 한경ESG 기자 cs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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