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난간에 서 있는 사람, 다리 위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시민, 극단적 선택 직전의 누군가. 이런 긴박한 순간에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한다. 구조대를 이끌고 달려오는 소방관, 넓게 펼쳐진 에어매트, 주변을 통제하는 경찰관들의 모습은 뉴스 화면에 생생하게 담긴다. 그러나 실제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결정적 순간, 절망의 끝에 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이는 따로 있다. 바로 경찰의 위기협상팀이다.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싸우는 심리 전문가들
지난 5월 13일, 서울 강남역 인근 15층 건물 옥상에서 한 남성이 투신을 시도했다. 3시간 30분의 긴박한 협상 끝에 무사히 구조된 이 사건의 숨은 주역은 서울경찰청 대테러 위기협상팀의 주협상요원 김효정 경위였다. 그는 정신건강 분야 국가자격증을 갖춘 심리특채 1기 출신으로, 대학병원 정신과 인턴 경험을 포함한 전문경력을 바탕으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는 안전장비인 하네스를 착용하고 15층 건물 옥상에 약 6미터 이동식 사다리로 직접 올라가 위기협상을 진행했다.
김 경위는 경기청 강력계에서 안양 초등생 살인사건, 조두순 사건 등 사회 이슈가 집중된 현장에 출동하여 피해자의 심리안정을 최우선으로 전담해왔다. 이후 국가인권위원회 침해조사국 인권상담센터 개소 및 운영을 위해 2년간 파견 근무를 했고,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를 거쳐 현재는 서초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에 소속되어 있다. 2012년에는 대한민국인권상을 수상했으며, 동국대학교에서 ‘경찰의 강력범죄피해자 보호에 관한 연구’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년 넘게 납치·살해 피해자의 유가족을 사후관리 차원에서 돌봐오며, 제도와 현장을 아우르는 실천형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세 개의 다른 위기협상팀, 다소 혼란스러운 체계
우리나라에는 세 층위의 위기협상팀이 존재한다. 경찰청 및 각 시·도경찰청 소속의 위기협상팀, 경찰서의 형사분야에서 자체 선발한 위기협상팀, 그리고 지구대 파출소의 위기협상팀이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이름을 쓰면서도 완전히 다른 체계로 운영된다.
서울청 소속 대테러 위기협상팀은 현재 9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인력들이다. 반면 경찰서 자체 선발 위기협상팀은 대부분 실무자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문성 확보가 쉽지 않다. 한 위기협상 분야 관계자는 “위기협상팀이라는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인력풀 구성 방식이나 협상에 투입되는 인력의 전문성은 소속된 부서와 심리특채 등 입직 경로에 따라 편차가 있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마치 산불 현장에서 소방관과 산림청 산불진화대의 역할이 혼동되는 것과 같다. 자살 위기 순간에 실제 협상을 주도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전문성과 훈련 수준은 어떤지를 시민들은 잘 알지 못한다.
5년간 30% 증가한 자살시도, 홀로 위기를 감당하는 협상요원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자살 기도로 112에 신고된 건수는 2020년 9만5716건에서 2023년 12만747건으로 4년 새 26% 이상 증가했다. 하루 평균 330건이 넘는 자살 시도가 신고되는 상황에서, 이들을 감당해야 할 위기협상 전문요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경찰청에서는 전국 18개 시·도청에 각각 10명 이내의 위기협상요원으로 구성된 시·도경찰청 위기협상팀을 운영하고 있다.
각 경찰청의 위기협상팀 소속 협상요원은 일정 자격요건을 갖추고 신청자 대상으로 선발절차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경찰서에서 업무담당자로 지정되는 위기협상가와는 달리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서울경찰청 위기협상팀의 한 관계자는 “위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정해진 인력이 아닌 그때그때 가능한 요원이 현장에 출동한다. 긴급상황임에도 위기협상만을 전담으로 하는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한편으로 일관된 대응 체계를 갖추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라고 말한다.
서초경찰서의 혁신적 시도, 전국 유일의 ‘자살기도자 특화 위기협상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서울 서초경찰서는 2023년 4월부터 전국 최초로 ‘자살기도자 특화 위기협상 전문요원’ 양성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본서 소속 12명과 지구대·파출소 소속 48명, 총 60명의 전문요원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강남역 사건에 투입된 김효정 경위가 서초경찰서 소속이다. 서초서가 이러한 전문교육 시스템을 선도하고 있으며, 동시에 김 경위가 서울청 대테러 위기협상팀의 주협상요원이기도 하다는 점은 전문성이 한 곳에 집중된 좋은 사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아직 서초서가 유일하다.
심리적 전선에서 싸우는 시·도 경찰청 위기협상요원의 부담
소방관이 물리적인 위험과 싸운다면, 위기협상요원은 심리적 위험과 싸운다. 자살 시도자의 절망 속으로 함께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한 위기협상요원은 “협상 당시에는 온전히 대상자에게 집중하느라 피로를 느끼지 못하다가, 끝난 뒤에야 탈진한다. 성공한 협상 이후에도 다음엔 실패할까 하는 불안과 자책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위기협상은 대상자의 생명이 걸린 고도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그들에겐 치유받지 못한 잔상이 남지만, 공식적인 심리 지원 체계는 여전히 부족하다.
초동 대응 경찰의 위기협상 역량 강화 필요성
자살 기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이들은 소방이 아니라 파출소와 지구대 소속 경찰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위기협상에 대한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현장을 마주한다. 한 파출소 경장은 “말 한 마디에 누군가가 결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을 아끼게 된다”라고 털어놨다.
강남역 투신 시도 현장에서 고층에서 6미터가 넘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던 김효정 경위는 위기협상 이후 야간 당직을 하면서 2층 침대 철제 사다리를 올라가는데 당시 현장이 생각나서 올라가지 못하고 잠시 주저했다고 회상한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경찰의 위기협상 전문성을 높이고 협상요원의 소진 예방을 위해 경찰서를 다니며 강남 사례를 통한 위기협상 강의를 하고 있다.
함께 기억해야 할 생명의 수호자들
뉴스에는 자살 시도자가 구조된 결과만 보도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전문성과 훈련, 용기와 헌신이 있다. 목숨을 걸고 사다리를 오르는 경찰 위기협상요원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매일 싸우고 있다.
서초경찰서의 사례처럼, 이들의 전문성과 시스템이 전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자살 시도는 계속 증가하지만, 이를 막을 수 있는 제도와 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동국대 임준태 교수는 “지구대마다 최소 1명 이상의 전문 협상요원이 배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명을 지키는 일은 헌신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헌신을 뒷받침할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우리의 관심이 함께해야 한다. 불 속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영웅이듯, 절망 속에서 내려오는 마음을 붙잡는 이들도 영웅이다. 경찰 위기협상팀, 그 조용한 영웅들을 기억하자.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생명을 지키는 결정적 전선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현대 사회의 금속 같은 안전망이자, 몽석처럼 공동체가 품어야 할 조용한 신뢰의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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