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주류 정치인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온 가족이 경기 성남으로 올라왔다. 이 대통령은 중학교 진학 대신 공장에 취업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고졸 출신 간부를 보고 학업을 결심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갔다.
중앙대 법대에 들어가 사법고시를 쳤다. 사법연수원에 강연을 온 노무현 당시 인권변호사가 “변호사는 굶지 않더라”고 한 얘기를 믿고 판검사가 아니라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정치 입문 후엔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아웃사이더’ 이재명은 상대를 강하게 비판하는 ‘사이다 발언’으로 정치 체급을 키우기 시작했다. 거대 야당의 당권을 거머쥐고 당을 친명(친이재명)계 중심으로 재편했다. 체급을 키울 때마다 그를 따르는 지지자도 늘어났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고(故) 노무현 대통령처럼 ‘흙수저 신화’를 기반으로 대권을 거머쥐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가족이 새 터전을 꾸린 성남 상대원시장 근처는 당시 빈민촌이었다. 이 대통령은 공장에서 소년공으로 일했다. 스키 장갑과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목 관절이 눌리는 사고를 당한 것도 이때다. 이 대통령의 왼팔은 이때 사고로 비틀어져 있다.
지독한 가난의 굴레를 벗을 희망은 공부였다. 이 대통령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 고입 및 대입 학력고사를 치렀다. 하루 두 시간씩 자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고 입학했다.
이 대통령은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지만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노무현 당시 변호사의 연수원 강연에 감명받아 인권 변호사의 꿈을 꿨다.
성남에서 법률사무소를 연 ‘변호사 이재명’은 2003년 성남 종합병원 두 곳이 폐쇄돼 의료공백이 발생하자 당시 성남 인구 절반에 가까운 2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성남시의회에 병원 설립에 관한 조례안을 상정시켰다. 하지만 성남시의회의 다수당이던 한나라당이 반대해 조례안은 저지됐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거세게 항의하다가 특수공무방해죄로 고발당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이때 숨은 곳이 성남시의회 건물 맞은편에 있는 주민교회다. 이 대통령은 이곳에서 “정치로 시민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돼 지방 행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장으로 취임한 지 12일 만에 돌연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불이행)을 선언하며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
이 대통령은 당시 일선 공무원에게 민원 처리와 시정 홍보를 강조하며 생활밀착형 행정에서 성과를 냈다. 그는 2014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전보다 높은 득표율로 성남시장 재선에 성공했다.
이 대통령은 2018년 경기지사에 당선된 이후에도 파격적인 정책으로 이목을 끌었다. 도내 계곡 불법점거물 철거 등을 밀어붙여 무사안일, 보신주의로 점철된 공직 사회에서 적극 행정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이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가 본격적으로 고조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검찰은 이 대통령을 대장동·백현동·성남FC·쌍방울 대북송금 사건 등으로 줄줄이 기소했다. ‘검사 사칭’ 위증교사, 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에 대한 국회의 이 대통령 체포동의안 가결은 이 대통령 정치 인생과 민주당 운명에 변곡점이 됐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이 대통령은 구속 수감 위기를 면했지만 이는 당내 비명(비이재명)계 입지가 급격히 쪼그라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듬해 1월 부산 가덕도 신공항 예정 부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피습을 당했고 가까스로 생명의 위기를 넘겼다. 구속영장 기각과 피습 사건에 더해 윤석열 정부의 잇단 실정은 22대 총선에서 이 대통령이 이끈 민주당이 압승하는 배경이 됐다. 윤석열 정부 운신의 폭은 크게 위축됐고, 급기야 ‘12·3 비상계엄’ 선포까지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야당 대표로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키고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처리하는 데 앞장섰다. 탄핵 정국에서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기류가 강해졌다.
윤 전 대통령 파면 직후 치러진 당내 대선 경선에서 89.77%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됐다. 그는 민주당이 중도보수 정당임을 강조하며 외연 확장을 시도했고, 특히 실용주의와 국민 통합을 제시하며 중도표를 끌어와 대권을 거머쥐었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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