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마을 어귀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여름이면 더 우거진 나무 아래 둘러 모여 더위를 식히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나무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깃들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솟대나 장승도 마찬가지다.
한국 추상 조각의 원로 엄태정 작가는 조각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본다. 조각이 세워지며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세계는 세계화한다’(World Worlds)는 이런 그의 사유와 마주할 기회다. 1970년대 작업한 조각 작품부터 2000년대 회화와 드로잉, 올해 초 작업을 마무리한 신작 등 그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은 작품들로 작가의 조형 세계를 폭넓게 조망할 수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엄 작가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제시한 탈마법화(disenchantment) 이론으로 조각의 의미를 설명했다. 세상의 많은 일에 초월적 존재를 연관 지어 설명하던 과거와 달리, 과학과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예술 작품이 사람들에게 또 다른 환상의 세계가 된다고 소개했다.
“예술 작품은 아무런 목적도, 정보도 없습니다. 신비로운 아우라만 지녔을 뿐이죠.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물에 신이 내재됐다고 여기고 그 주위를 신성한 공간이자 공동체의 중심으로 만든 것처럼, 조각으로 세워진 또 하나의 세계가 만물의 길을 펼쳐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엄 작가는 한국 추상 조각의 기틀을 다진 1세대 조각가다. 1960년대 초 서울대 재학 시절부터 철의 물질성에 매료돼 금속 조각의 길로 들어섰다. 데뷔 초 강렬한 철 조각을 선보인 그는 이후 구리로 재료를 전환했다. 이 외에도 청동과 알루미늄 등 금속의 다양한 물성을 통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사유를 형상화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주로 알루미늄과 구리를 활용한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장 1층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작품은 올해 작업한 신작 ‘낯선자의 은신처-티탄의 은빛 베일-철인은 하늘을 걷는다’와 ‘낯선자의 은신처-은빛 베일 출현 I, 출현 II, 출현 III’. 2019년 발표한 네 개의 ‘낯선자들의 앙상블’과 그 궤를 같이하는 작품들이다. 구부러진 알루미늄 판지 뒤에 숨은 낯선 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때 오히려 더욱 강하게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통찰을 표현하고자 했다. ‘객정-방랑자’ 등이 전시된 3층에서는 작가가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도 엿볼 수 있다.
엄 작가의 조각에는 대지와 하늘, 인간과 사물, 그리고 시간과 정신이 교차한다. 20세기 현대 추상의 거장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탓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드로잉에는 브랑쿠시의 ‘무한주-끝없는 기둥’을 연상시키는 조형 요소가 포함돼 있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원에 자리 잡은 ‘법과 정의의 상’은 그에게 더 특별하다. 이 작품은 브랑쿠시를 존경하는 후예 조각가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고. “뉴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제 작품이 법과 정의의 상입니다. 세상의 균형과 질서를 따지는 대법원에 공개된 제 조각이 보는 이에게 어떤 교훈이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갑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엄 작가는 작가 경력 65년간 총 13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더 열심히 하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는 늙어 죽을 때까지 진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음 같아서는 이 공간에 작품을 50~60개는 채워 넣고 싶어요. 죽는 날까지 작업하고 싶습니다.” 전시는 오는 8월 2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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