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그 균형은 결국 무너졌다. 코카콜라, 스타벅스, 화이자 등 글로벌 고객사가 줄줄이 WPP를 떠났다. 광고대행사 1위 자리마저 빼앗겼다. 지난해 매출과 시가총액 등 여러 측면에서 경쟁사인 프랑스 퍼블리시스가 치고 올라오며 ‘왕좌’를 내줬다. WPP 주가는 최근 7개월 새 40%가량 하락했다.
구글도 마찬가지다. 구글이 2022년 내놓은 ‘퍼포먼스 맥스’란 기능을 활용하면 광고주는 구글 내 유튜브, 검색, 쇼핑 등을 하나로 묶어 자동으로 광고를 설계할 수 있다. 브랜드 마케터나 광고 전문가가 아니라 AI가 누구에게 어떤 광고를 보여줄지 판단한다. 광고를 본 사람이 클릭할지, 실제로 물건을 살지 AI가 실시간으로 예측하며 광고 내용을 스스로 바꾸고, 예산도 알아서 조정한다.
WPP와 같은 대형 대행사 소속의 ‘크리에이터’가 주인공인 광고의 시대는 저물었다. 이미지와 광고 카피는 대규모언어모델(LLM)이 생성한다. 여러 광고 중에 소비자 반응이 좋은 버전이 ‘AB 테스트’를 통해 자동으로 선정된다. 광고 예산 집행과 성과 분석까지 AI가 실시간으로 조정한다. 광고 실무자는 전략을 조율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가깝다. 이제 알고리즘이 과거 사람의 손과 머리를 대체했다.
광고산업의 중심이 더 이상 광고대행사가 아니란 점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글로벌 테크 기업이 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예컨대 구글 모기업 알파벳의 지난해 광고 매출은 2650억달러로 세계 1위 광고 회사에 올랐다. 그 뒤를 이은 메타(1606억달러), 아마존(562억달러), 틱톡(450억달러), 알리바바(380억달러) 등도 전부 테크 기업이었다. 이에 비해 WPP 매출은 지난해 147억파운드(약 200억달러)로 초라한 수준이다.테크 기업뿐 아니라 액센추어 송 등 컨설팅 기업이 제공하는 전략 기반 마케팅 통합 서비스도 광고 대행사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컨설팅 업체들은 단순히 광고 캠페인을 하는 게 아니다. 브랜드 전략 수립부터 소비자 경험 설계, 앱 개발, 광고 운영 자동화까지 디지털 마케팅 전 과정을 책임진다.
예컨대 액센추어 송은 우버와 함께 광고 영업과 운영 시스템을 최근 전면 재설계했다. 이를 통해 100개 이상의 광고 운영 과정을 자동화하고, 광고 성과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대시보드도 구축했다. 이 시스템 덕분에 광고 영업 처리 속도는 기존 대비 70% 빨라졌다. 액센추어 송의 광고 매출은 2021년 125억달러에서 지난해 190억달러로 껑충 뛰었다. 전체 매출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수준에 이른다.
퍼블리시스는 자사 내부 AI 플랫폼 ‘마르셀’을 조기에 정착시켰다. 그 결과 퍼블리시스는 지난해 광고 매출과 시가총액에서 WPP를 앞질렀다. 유럽과 미국 양대 시장에서 주요 광고를 잇달아 따내며 확고한 1위 자리를 굳혔다. WPP의 최대 광고주인 코카콜라마저 가져갔다. AI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얼마나 빠르고 일관되게 조직에 녹여냈는지가 성패를 갈랐다.
WPP도 변화의 필요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속도는 느렸고, 조직은 무거웠으며, 크리에이티브의 자부심 탓에 기술 수용을 망설였다. 결국 AI를 외치면서도 경쟁에서 뒤처졌다. WPP뿐만이 아니다. 과거 성공 방식에 집착한 전통 광고대행사 대부분이 경쟁에서 밀려났다.
이런 변화는 광고대행사의 수익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은 자사의 생태계 안에서 광고를 집행하며 수수료를 가져간다. 이에 비해 광고대행사는 여전히 인건비 중심의 모델에 머물러 있다. 광고 한 건당 프로젝트 단가로 계산한다. 이 단가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광고주들이 광고대행사에 빅테크의 AI 기술 도입을 통해 업무 효율을 높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대행사가 요구에 맞춰 AI 기술을 활용해 효율을 높이면, 효율화에 따른 비용 감소분은 광고대행사가 아니라 광고주에게 돌아간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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