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여 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 언덕, 새의 날갯짓을 유심히 관찰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새는 왜 움직이지 않을 때도 공기 중에 떠 있을까. 날개를 똑같이 접은 상태에서도 왜 하강 속도가 일정하지 않을까. 새들이 활강 중 날개를 미세하게 비틀거나 접는 것이 어떻게 속도 조절과 방향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는 바람의 흐름과 날개 움직임, 공기 밀도와 부력, 양력이 발생하는 조건 등을 꼼꼼하게 메모했다. 새의 날개 골격과 근육, 막을 해부하듯 그리며 각 부위의 공기 마찰 각도와 압력을 수치화했다. 그가 노트에 기록한 스케치와 계산식이 500여 개에 이른다. 이 노트가 ‘새의 비행에 관한 코덱스’다.
전투기 수직이착륙 기술까지
그는 오랜 연구 끝에 새의 날개 움직임이 어떤 ‘질서’와 ‘수’를 따라 이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기라는 매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항을 만든다. 공중에 떠 있는 새는 공기를 사다리로 삼는다.” 새의 근육과 관절을 해부하며 공기역학을 연구하던 그는 인간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린 설계도는 오늘날 헬리콥터와 수직이착륙 비행기, 낙하산의 기원이 됐다.

다빈치의 통찰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의 생체 리듬과 현대 항공 기술 원리를 동시에 꿰뚫는다. 그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벌새의 비행 능력이다. 날갯짓 횟수가 1초에 50~200회나 된다. 그 덕분에 날개를 ‘∞’ 모양으로 움직이며 공중에 정지한 채 꽃의 꿀을 빨 수 있다. 이 정지 비행을 호버링(hovering)이라고 부른다. 이 ‘멈춤’은 단순히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무수히 빠른 ‘움직임’의 균형에서 나온다.

다른 하나는 기러기 떼의 낙하 반전 기술이다. 기러기들은 비행 중 갑자기 몸을 180도 뒤집거나 순식간에 자세를 바꿔 방향을 튼다. 이들이 급하게 몸을 비틀고, 급강하했다가 회전하며 궤적을 바꾸는 것은 천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착륙 지점을 조정하기 위해서다. 공기 저항을 최대한 끌어올려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바꾸는 이 동작을 휘플링(whiffling)이라고 한다. 기러기뿐만 아니라 오리 등 대형 철새도 높은 고도에서 지그재그를 그리며 낙하하곤 한다. 매와 독수리 역시 먹이를 급습하거나 급강하 착지 때 이 방식을 쓴다.
현대 항공 기술은 이들의 움직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헬리콥터와 드론의 공중 정지 기술은 벌새의 호버링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최신예 전투기 F-35B는 엔진 추력을 아래위로 바꿔 수직으로 이착륙한다. 벌새 기술을 본뜬 초소형 정찰 드론과 새처럼 날개를 움직이며 나는 생체 드론 또한 이 원리를 활용했다.

F-22 랩터 등 첨단 전투기들이 휘플링 같은 기동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분사 노즐 방향을 바꾸는 기술 덕분이다. 기러기의 휘플링은 낙하산의 회전 제어 기법에 적용됐다. 비행기 날개 끝을 위로 꺾은 윙렛(winglet) 설계는 날개깃의 비대칭 구조를 활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비행기 항력을 줄이고 효율을 높일 수 있게 됐다.
이런 기술은 거의 다 새가 가르쳐준 것이다. 새와 인간의 경계를 잇는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그 교차로에 다빈치 같은 ‘전인적 르네상스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시인, 이사도라 덩컨 같은 예술가가 있었다. 블레이크는 새의 자유로운 날갯짓에서 “붙잡으려는 순간 사라지는 기쁨”의 근원을 발견했고, 릴케는 새를 의인화해 “신의 손가락 끝에서 빠져나온 것”이라고 표현했다. 덩컨이 휘플링처럼 부유하는 춤을 추며 호버링처럼 공중 정지한 몸짓을 보여줄 때 그것은 새의 날개가 예술로 재탄생한 순간이었다.
새의 비행은 생물학 연구 대상을 넘어 공학과 예술, 철학 영역으로 확장된다. 현대 기술이 자연의 움직임을 본떠 혁신을 이뤘듯이 인류 문명의 미래도 자연의 원리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다빈치는 “자연이 최고의 스승”이라고 했다. 새는 그 스승의 손끝에서 태어난 가장 뛰어난 예술 작품이다.
'멈춤'과 '전환' 사이의 균형을
우리는 여전히 새처럼 날고자 한다. 제트엔진을 붙이고, 카본 날개를 달며, 인공지능으로 균형을 잡는다. 하지만 날갯짓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직관, 방향 감각은 아직 완전히 복제하지 못했다. F-35가 아무리 공중에서 멈춰 있어도 벌새만큼 고요하지 않다. 랩터가 아무리 곡예비행을 해도 철새만큼 날렵하지 않다. 자연은 그 비밀을 새의 궤적에 새겨두었다.
어쩌면 호버링과 휘플링은 자연과 인간을 함께 비추는 두 개의 텍스트다. 하나는 물리학이 해석한 날개의 운동역학이고, 다른 하나는 인문학이 그리는 비상(飛上)의 형이상학이다. 우리 삶의 영역에서 볼 때 호버링은 ‘멈춤’의 은유이며, 휘플링은 ‘전환’의 역설이기도 하다. 다빈치가 새의 부력을 연구하고 시인이 영혼의 양력을 연구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두 개의 텍스트, 두 개의 날개로 나는 균형이 필요하다.
속도를 줄이고, 몸을 뒤집고, 멈출 줄 아는 몸짓! 인생의 어느 순간엔 멈추고 다시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새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지금의 방향이 틀렸다면 기꺼이 몸을 반대로 뒤집으라.” “무작정 나아가기보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으라. 그 멈춤이 너를 더 멀리 데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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