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국내 금융권과 핀테크업계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단연 화두다. 고객 미팅에서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됐고, 관련 기업의 상표권 등록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업 모델에 대한 그림은 선명하지 않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일단 발만 담가두자”는 분위기 속에서 정작 그 안에 담길 알맹이는 아직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디지털 인프라를 앞두고 기업들은 어떤 기준과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기업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한국은 가상자산 거래량 기준 동아시아 1위, 글로벌 상위권에 속한다. 지난 1~2년 사이 블랙록, 코인베이스 등 글로벌 자산운용사와 디지털자산 사업자들은 한국 시장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기대와 달리 사업화와 산업화 측면에서는 의미 있는 움직임이 더딘 편이다.금융사와 핀테크 모두 스테이블코인을 주목하고 있지만 각자의 맥락에서 주저함이 있다. 금융사는 과거 빅테크와의 경쟁 과정에서 디지털 전환의 어려움을 체감했고, 핀테크는 규제 환경의 불확실성 속에서 선뜻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기 어렵다. 모두가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상황이다.
두 번째는 리스크 통제에 대한 부담이다. 스테이블코인 운영에는 자금세탁방지(AML)와 고객확인의무(KYC) 등 까다로운 요건이 따른다. 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금융사와 핀테크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핑크 역시 과거 “자금 세탁 위험이 크다”며 스테이블코인에 회의적이었고,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세 번째는 사업모델 기획의 어려움이다. 결제, 송금, 자산 운용 등 다양한 활용 사례가 거론되지만 기업의 사업화 관점에서 어디서 경쟁 우위를 확보할지, 누구와 손잡고 어떤 구조를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그림은 여전히 흐릿하다. 금융사와 핀테크 모두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구조 설계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 흐름은 과거 ‘채널 혁신’ 중심이던 디지털 금융과는 성격이 다르다. 마이데이터나 모바일 플랫폼처럼 사용자 경험을 바꾸는 수준을 넘어 지급 결제의 근간을 구성하는 인프라 자체를 새로 짜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다. 결제 수단이 ‘달러냐 원이냐’가 아니라 ‘블록체인 기반이냐 아니냐’가 되는 순간 그 위에 얹히는 비즈니스 모델도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블랙록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많은 것을 시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각 단계에서 “이 기술을 인프라로 어떻게 녹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자산은 여전히 리스크가 존재하지만 설계의 프레임을 갖고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명확한 사례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설계하고 있는가”다.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불완전한 기술이지만 그 불완전함을 감수하고 구조를 먼저 그리는 쪽이 시장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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