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15일, 영국 정부는 새로운 전기차 보조금 정책을 발표했다. 2022년 6월 보수당 정부에 의해 폐지된 직접 구매 보조금 제도를 3년 만에 부활시킨 것이다. 이번 정책의 공식 명칭은 ‘전기차 보조금(Electric Car Grant, ECG)’으로 총 6억5000만 파운드(약 1조2000억 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보조금 지원은 2028년부터 2029 회계연도까지 이어진다.
영국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이번 보조금은 차량 가격이 3만7000파운드 이하인 전기차에 한해 차량당 최대 3750파운드(약 700만 원)까지 차등 지원한다.
영국의 이번 정책은 자동차 제조사의 지속가능성을 보조금 지급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영국 정부는 자동차 제조사가 과학 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SBTi)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SBTi 승인 기업에 대해서는 자동차 조립 위치와 배터리 생산지의 국가 전력 온실가스배출 계수를 각각 30%와 70% 반영해 보조금 금액을 차등 지원한다. 모든 조건을 충족해도 자동차 제조사가 SBTi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소비자는 구매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사실상 영국에서 전기차 판매가 어려워지는 셈이다. 이로써 RE100에 이어 SBTi가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등장했다.
SBTi는 2014년 RE100에 참여하고 있는 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CDP), 세계자원연구소(WRI), 세계자연기금(WWF)과 유엔글로벌콤팩트가 공동 설립한 글로벌 기후 이니셔티브로 국제적으로도 높은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는 기구다. 기업이 수립한 넷제로 목표가 과학적 기준, 즉 1.5℃ 목표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국내에는 아직 생소하지만, SBTi는 전 세계 1만1000개 이상 기업과 금융기관이 참여하고 있는 세계 최대 기후 이니셔티브 중 하나다. 한국에서도 80개 이상 기업과 금융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SBTi에 참여하려면 SBTi의 요구 조건에 부합하는 넷제로 목표를 수립하겠다고 서약한 뒤 2년 내 목표를 제출하고 승인받아야 한다. 미국은 조 바이든 행정부 당시 연방 조달의 지속가능성 지침을 발표했는데, 5000만 달러 이상 정부 계약 참여 기업에 SBTi 승인을 의무화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며 해당 지침은 폐기됐지만, SBTi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는 “SBTi 외에는 기업의 감축목표를 체계적으로 다룰 방법이 없다”는 점이 확인됐고, SBTi가 사실상 표준 역할을 하고 있음이 입증됐다.

SBTi, 한국에 미치는 영향…무역장벽 확산되나
영국은 유럽에서 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다. 2024년 전체 신차 판매량은 약 195만 대이며, 이 중 순수 전기차(BEV)의 비중은 19.6%(약 38만 대)에 달한다. 영국은 2035년까지 하이브리드를 포함한 내연기관 차량 신차 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2030년까지 신차 판매의 80%를 순수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2025년 목표는 28%다.
현대차와 기아는 최근 영국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다. 2025년 6월 기준, 월간 전체 신차 판매량 순위에서 각각 4위와 5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전기차 시장에서도 두 회사의 합산 점유율은 9~10% 수준에 달한다. 테슬라, 폭스바겐, BMW, BYD 등과 경쟁하고 있다.
다만 이번 전기차 보조금 제도 도입으로 현대차·기아의 영국 내 경쟁력은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기아는 여전히 SBTi 목표 수립 서약조차 하지 않은 반면 폭스바겐, 르노, BMW, 메르세데스-벤츠 등 유럽의 주요 경쟁사는 이미 SBTi 목표를 승인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조금이 저가 차량에 한정되고, 테슬라와 BYD 등도 SBTi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향이 제한적일 수 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며 전기차 확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만큼 시작부터 시장의 주도권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우려는 부정하기 어렵다.
이번 영국 정부의 정책은 단순한 소비자가격 지원을 넘어 제품의 생산과정과 제조사의 지속가능성까지 최종 가격에 반영한다는 정책적 명분과 중국산 전기차 견제를 위한 실리가 결합된 사례다. 이 같은 보조금 기준은 영국 내 다른 보조금 및 조달 정책으로 확대되거나 유럽연합(EU)의 다른 국가나 미국의 진보 성향 주(州) 등으로 빠르게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SBTi 목표를 당장에 수립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단순한 착각할 수 있다. 목표 수립은 쉬워도 이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SBTi는 기준이 RE100보다 훨씬 까다롭다. 기업이 SBTi 목표를 승인받으려면 자사 온실가스배출량뿐 아니라 공급망을 포함한 가치사슬(스코프 3) 전반의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한다. 예컨대 자동차 기업이 SBTi 목표를 수립하고 이행하려면 철강, 배터리, 차량용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시트 및 기타 내장재 등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을 납품하는 모든 공급망 기업이 함께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한다.
자국 내 공급망 비중이 높은 데다 국가 전체의 재생에너지 비중이나 전기로 비중이 낮은 한국이나 중국 같은 아시아 기업에는 더욱 어려운 과제다. 중국처럼 국가 차원에서 막대한 수출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는 한국 기업에 현지 보조금 기준 미충족은 당장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기업이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보조금 기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도 같은 이유다.
내수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국가다. 공급망을 통해 점진적으로 요구가 강화된 RE100, 상당한 준비 기간을 부여했던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보다 이번 영국의 조치가 미치는 영향은 훨씬 크고 즉각적일 수 있다. 당장 우리 기업의 제품이 소비자의 선택지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를 활용한 통상 압력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며, RE100 산단 등 재생에너지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제 우리도 상대의 전략에 대한 수동적 대응을 넘어 우리 스스로 기후변화 주도권을 갖고 이를 국익에 활용하는 능동적 전략을 함께 고민할 때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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