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넘게 이어진 앙금이 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배터리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침체)을 버텨내려면 ‘세계 최강’ 중국산이 발을 못 붙이는 미국을 잡아야 한다는 데 서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가격만 맞으면 거래를 재개할 수 있다”는 LG에너지솔루션 경영진의 제안에 SK넥실리스는 “최고 품질 동박을 최대한 싸게 납품하겠다”고 화답했다. 두 회사는 1조~3조원에 달하는 수준의 동박 공급에 합의하고 추후 구체적인 납품 물량을 결정할 예정이다.

LG는 SK의 동박 제품을 하반기 가동 예정인 미국 공장에 투입할 계획이다. LG의 북미 생산량은 130기가와트시(GWh)에서 내년에는 342GWh로 2.6배 가까이 늘어난다. 여기에 SK넥실리스의 동박을 넣기로 한 것이다. 전기차용 배터리뿐 아니라 에너지저장장치(ESS)에도 SK 동박이 들어간다.
두 회사가 합의에 이른 동박 공급 규모는 5년 이상 기간동안 5만~10만t으로, 전기차 250만~500만 대에 들어갈 수 있는 물량이다. 금액으론 1~3조원에 이를 수 있다. 동박은 배터리 음극에서 전류 흐름을 담당하는 핵심 소재다.
국내 동박 1위 업체(생산량 기준) SK넥실리스는 과거 LG에너지솔루션의 핵심 동박 공급사였다. 균열이 생긴 건 2019년부터다. LG에너지솔루션(당시 LG화학 배터리 부문)이 “SK온이 영업 비밀을 침해했다”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한 시점이다. SK온은 즉각 “LG에너지솔루션이 배터리 제조공정 특허를 침해했다”며 맞소송을 냈다. 양측의 소송전은 감정싸움으로 번져 LG(LG에너지솔루션, LG화학)와 SK(SK온, SK넥실리스, SKIET) 사이의 배터리 관련 신규 거래가 2020년부터 끊어졌다.
2021년 SK온이 LG에 합의금 2조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소송은 종결됐지만 양측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단기 스폿 거래 외에 대형 신규 계약은 없었다. LG는 SK에서 납품받던 동박 물량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와 중국 기업 등으로 돌렸다.
분위기가 반전된 건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올초부터다. “중국산 부품·소재를 가능한 한 쓰지 말라”는 정부 정책에 제너럴모터스(GM) 등이 동참하면서 LG에너지솔루션에도 배터리 소재를 다른 나라에서 조달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잇따른 증설과 공장 신설로 미국 내 배터리셀 생산량이 늘어나자 중국을 제외한 동박 생산량 1위 업체인 SK넥실리스가 필요했다. 지난 4월 SKIET가 분리막을 LG화학에 공급하기로 하면서 관계 회복의 물꼬를 텄고, 이번에 대규모 공급에 합의한 만큼 양측의 앙금은 사실상 해소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SK넥실리스가 원통형 46시리즈 등 프리미엄 제품에 들어가는 동박을 개발한 만큼 이 분야에 투자를 늘려온 LG에너지솔루션과 궁합이 맞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SK넥실리스는 대규모 공급을 통해 지난해 34.4%까지 추락한 공장 가동률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안정적 수입이 생기면 SK넥실리스가 2년 전 접은 북미 공장 건설을 다시 추진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두 그룹에 화해 무드가 생긴 만큼 LG화학과 SK온이 다시 거래를 트는 등 그룹 전체로 확산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성상훈/김우섭 기자 uphoon@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