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문 위주 서단에 한글로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이가 있다. 바로 서예가 평보 서희환(1934~1995)이다. 그는 1968년 제17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다. 미술 전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국전에서 서예가 최초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한문이 아닌 한글 서예가라는 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평보 서희환: 보통의 걸음’은 평보 일생의 작품을 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올해가 평보 서거 30주기이고 지난 1월 한글 서예가 국가무형유산으로 공식 지정된 것을 기념해 기획됐다. 작품 120여 점을 비롯해 평보가 남긴 일기와 에스키스 등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를 소개한다.
대통령상 수상은 평보에게 빛과 그림자를 함께 드리웠다. 한글 서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그의 필체가 스승 소전 손재형(1902~1981)의 필체와 지나치게 닮았다는 비판을 받은 것. ‘국전 파동’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수상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는 이런 지적을 자신만의 필체를 만드는 발판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궁녀가 쓰던 서체를 의미하는 ‘궁체’에서 시작해 스승 필체를 모방한 ‘소전체’, 그의 독창적 필체 ‘평보체’에 이르기까지 평보 글씨체의 3단계 흐름을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 주제는 ‘봄이 오는 소리’ ‘뿌리 깊은 나무는’ ‘서화동원(書?同源)’ ‘꽃씨 뿌리는 마음’ ‘푸른 동해 하얀 민족’ ‘작가가 작품을 탄생시키지만, 작품이 작가를 존재시킨다’ 등 여섯 개다.
전시장 막바지에는 평보 작품 중 엄선된 대작을 선보인다. 한글 약 1만 자(실제 9700자)를 10폭 병풍에 옮긴 ‘월인천강지곡’과 예술의전당 개관 시(詩) ‘찬란한 예술의 시대를’ 등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대왕이 석가모니 공덕을 찬양하며 지은 노래를 실은 책으로, 최초로 한글 활자로 인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보의 월인천강지곡은 이 내용을 1980년 좌우 5.5m에 달하는 병풍에 표현한 것으로,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힌다. 전시장에서 층고가 가장 높은 공간에 배치된 이 작품은 관람객이 마주하는 순간 활자에 표현된 생명력을 통해 한글 서체의 정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찬란한 예술의 시대를’은 시인 구상의 찬시를 평보가 옮겨 쓴 것이다.
이번 회고전 개최에는 숨은 조력자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30여 년간 평보 작품을 수집해온 고창진 씨의 도움으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전시장에 소개된 120여 점 중 약 100점이 그가 소유한 것이다. 이민진 예술의전당 홍보협력부 담당은 “보통 제자가 스승 회고전을 개최하는 경우가 많은데 평보는 제자가 없어 서거 30주기가 돼서야 일생 전반을 돌아보는 회고전을 열게 됐다”며 “제자보다 더한 애정으로 작품을 알아봐준 수집가 덕에 많은 이에게 평보가 남긴 족적을 소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개인 수집가인 고씨는 20대부터 평보 작품을 모았다. 그는 군 제대 후 우연히 평보의 자작시가 적힌 8폭 병풍을 접한 뒤 매력에 빠져들었다. 수집 초기에는 주변에서 한문 서예도 아닌 한글 서예를 왜 모으냐는 우려의 말이 많았다고 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고씨는 “제주도에 거주하는데 평보 작품이 있는 곳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비행기표부터 예매했다”며 “그렇게 30여 년간 작품을 모아온 덕에 이제는 얼추 평보 작품의 진위를 감정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10월 12일까지다.
강은영 기자 qboom1@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