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이 차려진 식탁. 생선을 씹고 있는 아빠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그것을 경멸하듯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 역시 그러하다. 이 소리 없는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는 ‘나’는 갖가지 화제를 던지며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만 소용이 없는 듯하다. 모든 것이 어긋나고, 늦어버렸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날 저녁. 그것이 우리 가족의 마지막 저녁 식사였다.
소마이 신지 감독의 일본 영화 ‘이사’(사진)는 부모의 이혼을 막기 위해 투쟁하는 11세 소녀 렌코(다바타 도모코 분)의 이야기다. 렌코의 엄마는 제법 괜찮은 회사에 다니지만 아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술만 홀짝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럼에도 렌코는 아빠가 좋기만 하다. 어느 날 아빠 혼자 이사를 떠나고, 엄마는 이제 독신으로 살 수 있다며 신난 듯 보인다. 하지만 렌코는 아빠가 그리워서, 정확히는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때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다.
학교의 아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렌코를 다른 이혼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 낙인을 찍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대단한 작전이 필요하다. 가출도 뻔하고, 단식 투쟁도 약하다. 렌코는 두 사람의 이혼을 막을 신묘한 전략을 세운다.
영화는 1993년 칸 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에서 처음으로 공개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최근 4K 디지털로 복원해 국내 재개봉했다. 이사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부모의 이혼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통해 급변하는 가족 시스템과 가부장의 붕괴를 우화적으로 그린 수작이다. 영화에서 이혼은 절망과 고통의 원천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이혼은 때로는 사회적 차별의 대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여성의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하다.
렌코는 엄마 아빠의 재회를 위해 꾸민 주말여행에서 많은 것을 보고 만난다. 화려한 불꽃놀이도 있고, 마쓰리(축제)가 끝난 후 타버린 기둥들이 있으며 우연히 만난 노인도 있다. 렌코는 밤새도록 이 모든 것을 탐험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그동안 숨겨놓은 이혼서류를 엄마에게 돌려준다. 아이러니하지만 이혼을 통해 세 가족은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아빠의 이사로 시작하지만 모두의 이사를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엄마는 그토록 원하던 결혼 전 성(姓)을 되찾아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고, 아빠는 마침내 가족의 따스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렌코는 ‘어른이 되는 길’을 습득한 듯하다. 그것은 완벽하거나 행복하지만은 않지만 다채롭고 신비로운 길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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