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7월 31일 08:14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자사주 기반 교환사채(EB) 발행과 관련한 태광산업과 트러스톤자산운용의 갈등이 '그린메일' 의혹 공방으로 비화했다. 그린메일은 상장법인 지분을 대량 매입한 주주가 적대적 인수합병(M&A) 등 경영권 위협을 포기하는 대가로 지배주주에게 주식을 되사줄 것을 요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주주 충실의무가 강화된 이후 태광산업과 트러스톤의 공방처럼 그린메일 의혹을 제기하는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충돌이 잦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3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태광산업은 트러스톤이 고가의 공개매수를 요구한 행위가 그린메일에 해당한다며 금융감독원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트러스톤은 태광산업 이사회에 '공개매수를 진행하더라도 응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서한을 보낸 바 있다며 태광산업의 그린메일 의혹 제기는 억측이라고 맞받았다.
그린메일은 기타주주가 상장법인의 주식을 매입한 뒤 회사의 약점이나 지배주주의 사익편취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지배주주를 압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회계장부열람권이나 주주제안, 주주총회소집청구권 등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며 압박 강도를 높여가다가 주가가 오르면 지배주주에게 경영권 위협을 포기하는 대가로 보유주식을 고가에 되사줄 것을 요구한다.
대주주에게 편지를 보낼 때 초록색인 달러화를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그린메일(green mai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린메일은 기업가치를 훼손시키고 다른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기 때문에 세계 각국 정부의 규제 대상이다. 미국은 연방세법으로 그린메일을 통해 얻은 이익에 50%의 소득세를 부과한다. 우리나라에선 그린메일을 규제하는 특정한 법령은 없지만 사기적 부정거래나 시장교란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도 그동안 생소했던 그린메일 공방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게 KCGI의 DB하이텍 투자가 거론된다. KCGI는 2023년 3월 DB하이텍 지분 7%를 취득하고 주주활동에 나섰다. DB하이텍의 기업가치가 저평가됐다며 자사주 소각과 이사회 독립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같은 해 연말 KCGI는 보유했던 DB하이텍 지분 대부분을 DB하이텍 최대주주인 DB아이엔씨에 당시 시가보다 10%가량의 프리미엄을 받고 매각했다. KCGI의 지분 매각으로 주가가 급락하자 손실을 보게 된 소액주주들은 KCGI가 DB그룹과 공모하고 프리미엄을 챙겼다고 금감원에 진정을 제기했다. KCGI는 DB그룹이 지배구조 개선 요구를 수용해 엑시트(투자금 회수)를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현 정부의 소수주주 이익 보호 강화 정책에 따라 태광산업이나 KCGI 사례처럼 '그린메일' 공방이 자주 불거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공시규정 강화, 주주제안, 집단소송제도, 감사위원 선임 시 지배주주의 의결권 제한 등은 대표적인 소수주주 보호 장치들이다. 소수주주 보호장치가 제대로 갖춰진 환경일수록 제도를 악용하는 세력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주주연대나 행동주의펀드의 주주권 행사가 규범을 일탈하지 않더라도 지배주주와 갈등관계에 있는 한 이들의 행위가 '그린메일'로 공격받을 가능성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다.
투자은행(IB) 업계 일각에선 주주 충실의무 강화로 상장사들의 자진 상장폐지가 많아지는 상황에서 그린메일이 횡행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그린메일이 자주 활용되는 대표적인 경우가 상장법인이 자진 상장폐지를 위해 공개매수를 시도할 때다. 현행 유가증권·코스닥시장 상장규정상 상장사가 자진 상장폐지를 신청하려면 최대주주가 지분 95%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최대주주의 상장폐지 의도를 미리 예측한 일부 주주가 지분을 5~10% 이상 매입한 다음 공개매수를 무력화시키고, 최대주주 측에게 프리미엄을 받고 지분을 매각하는 사례가 나타날 수 있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과거 행동주의펀드가 주주권리 행사에 나서고 지배주주와 갈등을 빚을 때 '기업사냥꾼'이라는 비난이 따라붙었던 것처럼 그린메일 의혹 제기도 빈번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송은경 기자 nor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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