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경리, 시인 황지우와 박목월,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그리고 부처, 예수까지. 온라인 서점에 ‘필사’를 검색하면 나오는 이름들이다. 유명인들이 남긴 문장을 따라 쓸 수 있도록 모아놓은 필사책이 인기를 끌고 있어서다.30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 들어 이달 20일까지 출간된 필사책은 189종이다. 2022년 한 해에 86종, 2023년과 2024년에 각각 104종, 142종 출간된 데 비해 크게 늘었다. 나민애 서울대 교수가 추린 시 77편을 담은 필사책 <단 한 줄만 내 마음에 새긴다고 해도>는 7월 넷째 주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9위를 차지했다.
필사책 열풍은 국내 서점가에서만 일어나는 기현상이다. 해외에서는 필사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국내 한 출판 관계자는 올해 6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외국 출판인들에게 필사책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한국에서 필사책이 인기라는 설명에 “문장을 베껴 쓰고 싶으면 그냥 공책에 적으면 되는 것 아니냐” “왜 한국인들은 필사를 위한 책을 따로 만드냐” 하는 질문이 돌아왔다. 필사책을 그냥 ‘pilsa-book’으로 번역했을 정도다.필사를 즐기는 사람들은 엄선된 문장을 베껴 쓰는 과정을 통해 깊이 읽기와 글쓰기 능력 향상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유선경 작가는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에서 “필사는 가장 깊이 책을 읽는 방법”이라며 “눈으로 읽을 때는 미처 알지 못한 이야기가 읽힌다”고 썼다.
손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에 목적을 두기도 한다. 30대 직장인 신모씨는 “요즘은 대부분 업무와 의사소통이 전자 기기로 이뤄지기 때문에 손글씨를 쓸 일이 많지 않다”며 “필사는 일종의 디지털 디톡스이자 명상”이라고 말했다.
출판계 불황의 이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필사책이 새로운 책 출간에 들어가는 기획 비용을 아끼는 수단이 됐다는 것이다. 필사책은 새로운 책을 기획하고, 작가를 발굴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최근 필사책은 베스트셀러의 후속편과 유사하다. 아이돌 가수가 추천한 <초역 부처의 말>이 인기를 끌자 이 책에 필사를 위한 노트 칸을 추가한 <초역 부처의 말 필사집>이 나오는 식이다. 기존 책의 필사책을 낼 때는 번역료도 추가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필사책은 표지만 바꿔 신간 효과를 노리는 리커버 도서와 비슷하다”며 “어떤 책이 인기를 끌면 관련 필사책을 내면서 일종의 자기복제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