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이제 기업의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다.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 기술의 급진적 변화는 기업의 역할을 근본부터 바꾸고 있다. 과거엔 좋은 제품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책임이 요구된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정부와의 동행’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이를 뒷받침할 제도와 사회적 공감이 없다면 시장의 혁신은 멈춘다.
‘물’은 기업 혁신과 정책의 엇박자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물은 한때 저개발국가의 문제로 치부됐다.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물에 익숙한 우리나라에서 물 부족은 막연한 환경 이슈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기후 위기 시대, 물은 더 이상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자원연구소는 2040년이면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심각한 물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매드맥스’에서처럼 물을 장악한 자가 권력이 되는 미래가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기업에 물은 단순한 환경 리스크가 아니다. 전자, 식음료, 의류, 생활용품 등 물 소비가 많은 산업에선 물이 곧 원가이고, 브랜드이며, 미래다. 누가 더 적게, 더 효율적으로, 더 책임감 있게 물을 다루는지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갈린다.
‘물’이라는 자원 하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변화에 가장 민첩하게 대응해 제품 혁신을 넘어 경영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기업이 여럿 있다. 프록터&갬블(P&G)도 그중 하나다. 세계 최대 생활용품 기업인 P&G는 찬물 세탁 세제, 고농축 세제 등을 앞세워 ‘불편하지 않은 친환경’이라는 새 기준을 시장에 제시했다. 물 사용량은 줄이고, 세척력은 높이며, 탄소 배출은 낮췄다. 익숙한 소비자 경험을 그대로 유지하며 지속가능성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기술과 시장, 환경과 소비자의 접점을 정확히 짚어낸 사례로 꼽힌다. 유니레버도 마찬가지다. 물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드라이 샴푸, 헹굼이 적은 위생용품은 단지 새로운 편리만을 만들어낸 신제품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듣는 정부’다. 시장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다. 혁신에 족쇄를 채우는 규제 대신, 혁신의 촉매가 되는 정책을 마련하고 시행해야 한다. 제도는 혁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혁신과 함께 설계돼야 한다.
전문가와 함께 실증 조사를 벌여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하거나, 다른 나라 제도와의 비교 연구 등을 제시하면서 설득력 있는 근거 기반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근거를 제시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관련 시민단체와의 협업 등을 통한 캠페인 등 사회적 공감대를 높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업은 정부 관계자, 시민단체, 언론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우려를 경청하고, 새로운 가치 기준을 제시하며 관련 정책이 입안될 수 있도록 지지 그룹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책은 더 이상 일방적 통보가 아니다. 기후 위기, 기술의 진보 등은 정부와 기업이 파트너로 같이 대응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한다. 정부와 기업이 공동 설계자로 협력해야 하는 시대다. 혁신과 정책은 줄탁동기 해야 한다. 안에서 병아리가 껍데기를 쪼고, 밖에서 어미가 동시에 응답할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나온다. 지금 큰 시각으로 ‘함께 두드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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