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웅장한 기운이 객석을 감싸며 막이 오르기 직전의 긴장감이 흘렀다. 세계 발레의 심장부에 한국인 발레리노 전민철(21)이 3막의 고전발레 ‘라 바야데르’ 주인공 솔로르 역으로 첫 무대를 밟는 순간이었다. 세계 최고 명문 발레단 데뷔라는 꿈같은 현실과 이튿날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의 솔직한 감회가 하나의 숨결처럼 이어졌다.

전민철은 지난해 9월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서 솔로르 역할로 무대에 섰다. 유니버설이 마린스키 버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두 작품의 안무는 같다. 발레단이 전민철을 빠르게 마린스키 무대에 내세울 수 있었던 이유다. 낯선 환경 속에서 그가 3막의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수를 보낼 만했는지, 관객들은 날카로운 평론가의 시선을 거둬들이고 여섯 번의 커튼콜을 허락했다. 공연장 앞줄에는 20명 남짓한 한국 팬들이 자리를 지켰다. 출연자 출구는 그를 기다리는 현지 팬까지 뒤섞여 인산인해였다. 자신을 ‘20년 발레 팬’으로 소개한 이리나 베레즈키나 씨는 “전민철의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 독특하다. 전에 보지 못했던 스타일을 발견해 기쁘고,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고 했다.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전민철이 연기한 솔로르는 지난해 선보인 솔로르보다 무게감이 뚜렷했다. 걸음걸이와 눈빛, 동작에서 신분 상승을 향한 무사의 야망, 풋풋한 연애 감정 등이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데지레(잠자는 숲속의 미녀), 지크프리트(백조의 호수) 같은 전형적인 왕자가 아닌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본인 나름의 분석을 치열하게 한 결과다. 여주인공인 무희 니키아를 연기한 나데즈다 바토에바와의 2인무도 큰 실수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사랑이 비극으로 치닫는 세 시간의 여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데는 어려움이 엿보였다. 2인무에서 어긋난 파트너링은 때때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전민철의 호연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 무대였다.
공연 직후 백스테이지에서 전민철은 자신의 마린스키 발레단행에 결정적 역할을 한 유리 파테예프 발레마스터(전임 예술감독)와 안드리안 파데예프 예술감독 사이에서 섰다. 파데예프 예술감독은 “마린스키 극장의 관객은 전민철이라는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솔로르로 살자.’ 리허설부터 무대에 오르기까지 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지냈다. 일부러 보폭을 넓혀 느릿느릿 걷고 평상시에도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캐릭터에 녹아들었다. 리허설 전에는 반드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그 결과 본인이 맡은 솔로르에 한해서는 단 하나의 의심 없이 공연을 해냈다. “공연이 끝나고 새벽 4시까지 깨어 있었어요. SNS에 많은 분이 공연 영상을 올려주셨는데, ‘이 장면에서 내가 이렇게 했나’ 하고 저도 관객의 시선으로 봤어요.”
전민철은 이번 공연에 대해 “잘한 점보다 배운 점을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나만의 캐릭터를 만든 다음 무대에서 흔들림 없이 연기한 것. 이 점이 좋았어요. 예전에는 여자 무용수에게 손을 내밀 때 ‘이게 맞나? 내가 왜 방금 이 동작을 했지?’라며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 적도 있거든요. 이번 공연에선 그럴 일이 없었어요.” 2인무 파트너링이 연습 때처럼 매끄럽게 나오지 않은 순간은 그에게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마린스키발레단의 전현직 단장으로부터 ‘발레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가 다음번에 맡을 역할은 무엇일까. “‘백조의 호수’와 ‘지젤’은 클래식 발레를 사랑하는 무용수로서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고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의 친구 머큐쇼가 매력적으로 느껴져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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