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퇴근시간에 찾은 충남 서산 대산석유화학단지 인근 먹자골목에서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직장인을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적자에 내몰린 기업들이 회식을 줄인 데다 상여금이 사라지면서 근로자의 주머니가 홀쭉해진 탓이다.
석유화학산업의 위기는 먹자골목에 터를 잡은 점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 집 걸러 하나씩 ‘임대 문의’ 팻말이 걸렸기 때문이다. “권리금도 없고, 관리비도 안 받습니다” “계약하면 석 달치 임차료 빼줍니다”는 이곳에선 흔한 임대 조건이다. 정구영 대산읍상인회장은 “3~4년 전만 해도 식당마다 직장인으로 가득 찼는데 그런 호시절은 다시 올 것 같지 않다”며 “그렇다 보니 많은 상인이 대산을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불황은 산단이 들어선 지역 경제부터 망가뜨렸다. 롯데케미칼 LG화학 한화솔루션 여천NCC 등 한때 조(兆) 단위 수익을 내던 대기업이 적자의 늪에 빠진 탓이다. ‘낙수효과’가 사라지니 이들에 기대온 지역 상권과 하청업체들이 폐업과 도산 위기에 몰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무너진 지역경제는 상가 공실률에 그대로 드러난다. 11일 통계청에 따르면 GS칼텍스와 여천NCC 등이 있는 전남 여수 도심의 상가 공실률은 작년 2분기 12.0%에서 올 2분기 35.1%로 세 배 가까이로 상승했다. 여수 도심 상가의 3분의 1 이상이 비었다는 얘기다.
석유화학업체들이 건넨 일감으로 생계를 꾸리던 하청업체들의 위기감은 더하다. 대부분 시설 운영·보수, 소재·부품 공급, 운송 업체인데 일감 자체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일부 업무는 대기업이 비용 절감 차원에서 직접 하기 시작해서다. 수입이 줄어들자 상당수 중소 협력업체는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작년 초만 해도 직원 15명을 뒀던 여수의 한 배관 공급업체는 1년6개월 사이 절반가량을 해고했다. 이 업체 대표는 “올 들어 신규 주문이 한 건도 없었다”며 “이대로면 폐업 외엔 답이 없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불황은 여수시를 넘어 전남 전체를 흔들고 있다. 별다른 대기업이 없어 여수산단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여수산단 생산액은 2022년 99조4000억원에서 2024년 88조8000억원으로 10% 넘게 줄어들었다. 여수시 관계자는 “올해 여수산단 신규 투자는 단 한 건도 없다”며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여수 지역 경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롯데케미칼과 LG화학 등이 입주한 대산산단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정구영 상인회장은 “대산읍에 있는 식당과 술집 등 점포 250개 중 25개가 문을 닫았고, 100여 개는 새 주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케미칼 대산공장 정문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전건주 씨는 “몇몇 공장이 문을 닫고 직원들의 씀씀이가 줄어들면서 매출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고 말했다. 4년 전 90%가 넘던 롯데케미칼 대산공장 가동률은 현재 80%대로 떨어졌다. 여기에 HD현대오일뱅크와 진행 중인 공장 통폐합이 마무리되면 직원마저 줄어든다.
울산산단 역시 협력업체를 중심으로 인력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석유화학업계 종사자가 작년 1만5386명에서 1만4615명으로 771명(5.0%)이나 줄었다. 울산산단에 있는 SK지오센트릭은 NCC 공장을, 롯데케미칼은 고순도이소프탈산(PIA) 공장 등을 멈춰 세웠다. 성과급을 줄 형편이 안 되는 석유화학기업들은 직원들에게 곶감 등 가벼운 선물세트로 이를 대신하고 있다.
울산시 관계자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이끈 부수입이 줄면서 지역경제에 직격탄이 됐다”며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 등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울산=안시욱/여수=성상훈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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