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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찬란한 나의 서울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입력 2025-08-12 17:07   수정 2025-09-23 17:40



사람은 장소에 의해 탄생한다. 장소가 사람 됨됨이와 정체성을 빚는다는 뜻이다. 장소는 장소애를 만들고,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일종의 패스포트다. 이방인이 노스탤지어를 앓는 것은 장소애가 원인이다. 나는 철과 시멘트와 유리로 된 도시에서 살며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종로서적과 시립도서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와 ‘필하모니’를 드나들며 청년기를 보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창업을 했다. 내 삶의 기반인 서울은 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가고, 도시와 나 사이에는 틈과 서걱거림이 존재했다. 내게 서울이란 무엇이었을까? 그 숙고가 이뤄진 것은 서울을 벗어난 뒤다. 서울 바깥에서 서울이 훨씬 더 잘 보였다.

'울트라 모던'의 근대도시 경성

1938년 4월, 한 청년이 만주를 떠나 경성역에 닿는다. 193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의 ‘대경성 건설’ 프로젝트로 도시 경관이 바뀐 경성에 도착한 이 청년은 만주 이민 3세대로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마칠 때까지 ‘모던 껄’과 ‘모던 뽀이’들과 더불어 경성 거주자로 살았다.

당시 시인이자 기자인 박팔양은 경성을 “청신한 감각의 세계, 찰나적이요, 기분적인 도취의 세계”이자 “실로 아름다운 근대의 무지개”라고 묘사한다. 연극인 박노아는 경성을 “야릇한 피로, 귀가 멍멍한 음향, 농후한 색채, 환각적 말초신경의 기괴한 발동, 이런 모든 조건을 구비한 현대적 또는 푸로페라적 고속도의 강렬한 자극”으로 가득 찬 도시라고 증언한다.

경성 시내를 가로지르고 전차들이 다녔는데, 전차 노선은 13개, 운행 전차는 총 143대였다. ‘울트라 모던’의 근대도시 경성 도심은 백화점 이벤트, 거리 행사, 가장행렬로 온갖 음향과 색채와 어우러진 활기가 넘쳐났다. 판탈롱 바지를 입고 에나멜 구두를 신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고, 밤엔 온갖 네온사인과 상점 조명들이 번쩍였다. 경성의 근대인이 선망한 것은 자유연애, 피아노, 스위트홈, 다이아 반지, 양식, 오후의 산책로, 백화점 나들이, 극장 특등석, 예금통장 등이다.

1934년 경성 인구는 38만 명을 찍고 이듬해 44만 명을 초과하는데, 조선인이 31만 명, 일본인은 13만 명이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경성 인구는 70만 명을 넘고 100만 명을 눈앞에 둘 무렵 혼마치(충무로 일대)에는 일본 상권, 종로엔 조선 상권이 들어서며 경쟁을 한다. 1936년 대중지 <삼천리>에 실린 조선총독부 경무감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의 기사가 눈길을 끈다. “명랑하고 점잖은 사교 딴스홀이면 부부 동반하여” “상쾌한 곡조에 맞추어 한 스텝, 두 스텝 밟고 나면 확실히 유쾌해지니까요”라며 “딴스홀을 허하여 달라”는 기사에서 대중의 발칙하고 대담한 유흥 욕구를 날것으로 드러낸다.

동경과 유혹, 도취와 파멸 혼재

‘동아시아의 관문’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특급열차 노조미와 히카리는 관부연락선으로 입국한 일본인을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저 만주의 펑톈, 신징, ‘동양의 파리’라는 하얼빈으로 실어 나른다. 간혹 하얼빈에서 러시아 땅을 횡단해 프랑스 파리까지 가는 이도 있었다. 부산에서 파리까지는 14일이 소요됐다. 당시 조선인에게 만주는 인생을 바꿀 기회의 땅, 엘도라도였다. 만주박람회에는 하루 1만 명의 인파가 몰릴 정도로 만주 붐이 일어난다.

염상섭, 안수길, 백석 같은 작가를 포함해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는 숱한 조선인이 ‘가자, 만주로!’라는 외침에 들떠서 만주행 엑소더스 대열에 동참한다. 만주로 건너간 이들 중 항일 투사도 있지만 대부분 하급 관료나 막노동에 뛰어들고, 더러는 마적 떼에 끼어들고 아편쟁이로 전락해 비운의 삶을 마친다. 당시 일본과 만주 등에서 유랑한 조선인은 400만 명이 넘었다. 이는 조선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서양에서 직수입한 신상품들이 진열된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부(현재 신세계백화점)는 날마다 인파로 북적인다. 일찍이 경성에 진출한 미쓰코시백화점에 이어 일본 재벌인 히라다, 조지아, 미나카이 같은 백화점이 잇달아 문을 연다. 하이 모던으로 치닫는 시대 변화에 올라타 내면의 요동과 소란을 겪어낸 경성인의 눈에 비친 백화점은 근대 상품 전시관이자 현기증을 일으키는 소비 천국이었다. 그들은 미적 감각을 쇄신하며 동경과 유혹, 도취와 파멸을 빚는 근대의 풍속과 표준에 맞춘 새로운 생활양식에 길들여진다.

아홉 살에 처음 도착한 서울역

경성 시내에 카페, 끽다점, 다방들이 생겨나는데,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이순석이 소공동에 창업한 ‘낙랑파라’는 단연 주목을 받는다. 일본 유학에서 근대의 세례를 받은 문인과 지식인들은 낙랑파라로 몰린다. 양인 같은 하얀 낯빛을 한 키가 큰 사내, 백구두에 스틱을 휘두르던 ‘모던 뽀이’ 이상은 경성고공 건축과를 졸업한 뒤 낙랑파라에서 벗들과 어울린다. 그들은 가배차를 마시고 ‘유모레스크’를 들으며 끽연과 담소를 즐겼는데, 이 카페의 단골들로 이상과 그의 단짝인 박태원을 비롯해 김기림, 김소운, 화가 구본웅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상이 이화여전 출신의 변동림과 선을 본 장소도 이곳이다.

1964년 3월 어느 날, 나는 호남선 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한다. 그때 서울역 광장에서 어리둥절하던 나는 겨우 아홉 살 소년이었다. 나는 지존파의 묻지마 연쇄 살인, 한강대교와 백화점 붕괴, 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겪고 과밀 인구로 포화 상태를 이루는 도시로 탈바꿈하는 서울의 변화를 체화하며 장년기를 보냈다.

이 아름답고 찬란한 도시에서 올림픽 제전이 열렸지만 한강에는 ‘괴물’이 살고, 음습한 지하실에는 ‘기생충’들이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도시에서 나는 속절없이 나이가 들었다. 착란과 가짜 행복으로 충만한 이 서바이벌 장에서 내 자아는 찢기고 해체됐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돌아보면, 아득하고 또 아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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