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를 보기 위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앱을 연다. 그중 한 작품을 선택했더니 영상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나온다. 길이도 다르다. 회차별로 단 1~2분에 불과하다. 편수는 작품당 50~60회 정도다. 영상 옆엔 ‘하트’ 버튼도 있고 ‘공유’ 버튼도 있다. 국내 OTT 티빙에서 방영되고 있는 숏폼 드라마다.
OTT에 숏폼 콘텐츠가 들어왔다. 티빙은 8월 4일 자체 제작한 숏폼 콘텐츠 ‘티빙 숏 오리지널’을 공개했다. ‘닥쳐, 내 작품의 빌런은 너야’, ‘이웃집 킬러’, ‘불륜은 불륜으로 갚겠습니다’, ‘나, 나 그리고 나’ 등 4편의 드라마에 해당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외부 제작사와 협업한 ‘숏 드라마’ 프로젝트도 공개됐다. ‘잔혹한 나의 악마’, ‘이혼전쟁-All Or Nothing’ 등 숏폼 콘텐츠가 20여 편에 달한다.
이제 OTT에서 숏폼 콘텐츠를 즐기는 시대가 열리게 될까. OTT는 시청자의 시간을 최대한 끌어와야 생존할 수 있다. 이 어려운 ‘시간 전쟁’에서 짧으면서도 가벼운 콘텐츠로 접근성을 높여 승률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물론 긴 길이의 영상 문법에 익숙한 OTT가 짧은 영상의 문법과 흥행 요인을 얼마나 빠르게 익히고 정착시키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적응 시간이 끝나면 그 파급력은 꽤 클 것으로 보인다. 유튜브, 틱톡,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숏폼 콘텐츠 시청에 이미 익숙해진 시청자가 OTT에서도 해당 콘텐츠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OTT 드라마의 길이는 대개 비슷하다. 10부작 내외이며 회차별로 40~50분 분량에 해당한다. 처음 OTT 드라마가 나왔을 때만 해도 이 길이는 매우 파격적으로 여겨졌다. 16회차, 50분 이상으로 구성됐던 TV 미니시리즈에 비해 훨씬 짧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이마저도 길게 느끼는 시청자가 늘어나고 있다. 10분 내외, 심지어 1분도 안 되는 숏폼 콘텐츠에 중독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크게 변화해 버린 시청 패턴은 시청자가 OTT로부터 멀어지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플랫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문 빈도, 체류 시간, 정기 구독의 수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치열한 시간 전쟁의 한복판에 서서 시청자의 단 1분이라도 더 가져와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유튜브, 틱톡, SNS 등을 통해 숏폼 콘텐츠가 기하급수적으로 공급되면서 많은 사람의 시간이 해당 플랫폼들에 주로 몰리고 있다. OTT 드라마는 어느새 ‘작정하고’ 봐야만 하는 긴 호흡의 콘텐츠가 되어 버렸다. 그 숙제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하고, 대신 침대에 누워 가볍게 숏폼 콘텐츠 몇 개를 연달아 보다가 잠드는 사람이 많다. 이에 따라 ‘도파민’ 과잉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숏폼 콘텐츠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실제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2024 방송 매체 이용 행태 조사’에 따르면 국내 시청자의 70.7%가 숏폼 콘텐츠를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 대비 12.6%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유튜브, 틱톡 등 숏폼 관련 앱의 1인당 월평균 사용 시간은 52시간에 달한다. 넷플릭스나 티빙 등 주요 OTT 사용 시간(7시간 17분)의 7배가 넘는다.
이 같은 상황에서 OTT의 숏폼 콘텐츠 제작은 산업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특히 글로벌 OTT와 체급 자체가 다른 토종 OTT의 경우 시청자의 일상에 가볍게 파고드는 하나의 틈새 전략이 될 수 있다. 숏폼 콘텐츠의 제작비는 기존 OTT 드라마의 10분의 1 수준이거나 그보다 적게 들기도 한다. 제작비가 절감되면 콘텐츠의 성패가 주는 부담감이 크게 감소한다. 위험 부담이 적기 때문에 다양한 스토리 실험도 할 수 있다. 그중 인기작이 탄생한다면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하여 이보다 긴 미드폼(30분 이상), 롱폼 콘텐츠(40~50분 이상)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신인 창작자와 배우가 주류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도 열리게 된다. 현재 국내 드라마 시장엔 신인 창작자나 배우가 활발히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흥행이 어느 정도 보장된 유명 감독과 작가, 주연 배우들 위주로 섭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비슷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출연비 등 제작비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더욱 기발한 아이디어와 색다른 얼굴로 중무장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 OTT의 숏폼 콘텐츠가 어쩌면 그 등용문이자 출구가 될 수 있다.
숏폼 콘텐츠뿐만 아니라 OTT의 콘텐츠 길이에 대한 고민과 실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디즈니플러스는 미드폼 콘텐츠를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8월 22일 시작해 올 연말까지 이어가는 예능 ‘주간오락장: 한 주 동안 열리는 예능 종합 놀이터’이다. 해당 작품은 25~30분 길이로 구성된다. 요일별로 다른 포맷으로 제작됐으며 매주 5일에 걸쳐 차례로 공개된다. 매일 다른 재미를 짧고 굵게 선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 숏폼 콘텐츠보다는 길이를 늘려 숏폼으로는 미처 갖추기 어려운 완결성까지 채우겠다는 전략이다.
이 같은 OTT의 다양한 시도에도 간과해선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콘텐츠의 길이는 숫자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길이가 달라지면 영상의 소재, 구성, 출연자 등 다양한 요소에 걸쳐 변화가 일어난다. 특히 길이가 짧은 숏폼 콘텐츠를 만들다보면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 오프닝부터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할 뿐 아니라 다음 회차도 연이어 시청할 수 있도록 결말에 이르기 전엔 궁금증을 유발하는 내용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극적인 내용만 나오다가 60초가 끝나버리곤 한다. 불륜, 이혼과 같은 소재를 내세우거나 폭력성과 선전성이 짙은 숏폼 드라마가 많은 이유이다.
도파민의 시대인 만큼 초반엔 이 전략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OTT 시청자의 기대치는 기존 숏폼 콘텐츠를 바라볼 때와 엄연히 다를 것으로 보인다. OTT는 잘 만들어진 오리지널 콘텐츠로 승부를 보는 플랫폼이며 시청자에게도 그 인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숏폼 콘텐츠를 볼 때도 어느 정도의 차별성을 기대하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 기대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다면 시청자의 실망감과 피로도는 크게 높아질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면 짧고 간결하면서도 내실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릴스와 동영상이 인스타그램 참여를 견인하고 있으며 릴스만 해도 앱 사용 시간의 5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4월 메타의 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했던 말이다. 릴스는 메타가 운영하는 SNS 인스타그램에서 제공하는 숏폼 콘텐츠 기능이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1분이 모이고 또 모여 전체 앱 사용 시간의 절반을 훌쩍 넘은 것이다. 도파민 과잉이 갈수록 심화하는 것은 우려되지만 국내외 각종 플랫폼의 숏폼 콘텐츠 전쟁이 가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나아가 국내 OTT가 성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열릴 수 있다면 새롭고 독창적인 숏폼 콘텐츠를 개발해 진검승부를 펼쳐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