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할 때 글과 그림이 한 덩어리로 늘 함께 있어요. 그림을 그리고 난 뒤 미처 다 담지 못한 잔여물이 글이 돼요. 혜성이 지나간 자리에 꼬리가 남는 것처럼.”한국인 최초로 미국 현대예술재단(FCA)의 ‘도로시아 태닝 상’을 수상한 현대미술가 이피(44·본명 이휘재·사진)가 첫 에세이집 <이피세(世)>를 출간했다. 2010년부터 2022년까지 12년에 걸쳐 쓴 미발표 글과 113점의 작품 도판을 엮은 책으로, 작가의 내면과 예술 세계를 고스란히 담았다.
이피는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아트스페이스3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책은 나의 지층 속 형상과 시간을 엮어 만든 또 하나의 전시”라며 “그림만 보지 말고 글도 꼭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아트스페이스3에선 책의 표지작 ‘천사의 내부’(2016)를 비롯한 주요 작품 10점이 전시됐다. 미국 시카고예술대에서 학·석사 과정을 마친 이피는 유학 시절 인종차별을 겪으며 ‘노란 피부’라는 자각과 함께 자신을 감싸는 ‘껍질’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됐다. 이 경험은 여성의 몸, 경계, 내부와 외부를 주제로 한 독창적인 회화·조각·설치 작업으로 이어졌다.
‘천사의 내부’는 생리통의 고통을 형상화한 그림으로 금분과 아크릴, 색연필을 사용해 여성의 몸 내부를 표현했다. 자궁과 갈비뼈를 연상시키는 모티프, 장기를 옷걸이에 걸어놓은 듯한 ‘내 몸을 바꾸기 위한 신체 진열대’(2017) 등은 몸과 세계 사이의 경계를 전복시킨다. 고려시대 불화 기법을 직접 배워 작업에 녹여낸 것도 특징이다.
책 곳곳에는 세상을 떠난 할머니와 관련된 기억이 등장한다. 오랜 투병 끝에 호스피스에 머문 할머니를 떠올리며 그는 “아픈 사람은 안에서, 건강한 사람은 밖에서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작가로서 삶과 죽음 사이에 창문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부재는 ‘승천하는 것은 냄새가 난다’ 같은 작품의 모티프가 됐다. 마른오징어를 이어 붙여 사람 형상을 만든 이 작품은 고통과 신체, 기억을 응축한 설치물이다.
이피는 시인 김혜순과 극작가 이강백의 딸이다. 김혜순 시집 <죽음 트릴로지>의 표지 드로잉도 그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싶어 엄마 시를 일부러 읽지 않았다”며 “협업이라기보다 엄마가 책에 쓸 드로잉을 달라고 해 아무거나 가져가라고 한 것”이라며 웃었다.
이번 신간의 제목은 2019년 개인전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에서 가져왔다. 당시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지층처럼 쌓인 형상들을 발굴해 자연사 박물관처럼 전시했다. 책의 1부 ‘미술계와 영계’에는 예술가로서의 내면을 기록한 에세이가, 2부 ‘나의 작품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작품과 대화를 나누듯 쓴 글이 담겼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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