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나라가 조선이던 1887년, 일본에선 아시아를 대표하는 화장품 기업이 탄생했다. 시세이도가 그 주인공이다. 한반도에선 청계천 한편의 분전(粉廛) 상인들이 오이즙과 연분을 양반가 규수와 궁녀들에게 파는 동안, 시세이도는 유럽 제품을 뛰어넘는 스킨케어를 만들겠다며 유럽 유학파들을 투입했다. 자국 전통문화와 결합한 ‘J뷰티’ 마케팅으로 일본 전체를 장악했고, 2차 대전 이후엔 세계로 뻗어나갔다. 시세이도의 명성을 뛰어넘을 만한 뷰티 브랜드는 종주국인 유럽에서도 많지 않다. 에스티로더, 로레알 정도만 거론된다.그런데 최근 한국의 신생 뷰티 기업이 이 시세이도의 몸값을 따라잡는 역사를 썼다. 요즘 주식시장에서 뜨거운 에이피알 얘기다. 몸값을 순식간에 8조원까지 불리며 국내 뷰티 브랜드 1인자인 아모레퍼시픽을 제치더니, 140년 가까이 아시아 맹주로 군림해 온 시세이도에 그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생긴 지 11년, 상장한 지 고작 1년밖에 안 된 기업이 말이다.
에이피알 성공 스토리는 다른 기업과는 많이 이질적이다. 스타트업이면서 굴지의 대기업들조차 포기하다시피 한 뷰티 디바이스 분야에 뛰어든 것부터가 그렇다. 대형 유통망에 제품을 얹지도 않고, 대형 미디어를 통한 마케팅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SNS와 인플루언서를 통해 입소문을 내고 자체 사이트에서 제품을 팔았다. 그런데도 수년 만에 판매망이 세계 각국으로 뻗고 있다. 알음알음 전 세계에서 몰려든 회원 수가 800만 명이다. 2년 전 30% 남짓이던 해외 매출 비중이 지난해 50%대로 치솟았고, 올해는 80%에 육박한다. 에이피알을 지금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힘을 꼽자면 남다른 ‘혁신의 속도’다. 시세이도나 에스티로더가 켜켜이 쌓아온 전통과 브랜드 파워를 단기간에 쫓는 것은 힘들다. 그 대신 에이피알은 제품 개발부터 마케팅을 거쳐 소비자들의 피드백을 다시 반영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압축하는 맹렬한 스피드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
이 회사는 젊다. 본사 임직원 400명 중 최고 연장자가 44세다. 37세인 김병훈 대표를 포함한 대부분이 2030이다. 대기업에선 대리급이었을 수뇌부는 팀원 회의를 하듯 임원 회의를 하고, 아니다 싶으면 체면도 안 따지고 곧바로 뒤집곤 한다. 그 문화가 회사 전체에 뿌리내렸다. 탈권위와 민첩성이 임직원 3만3000명의 거함 시세이도를 따라붙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에이피알뿐만 아니다. 뷰티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일단 빠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화장품 시장 환경은 무시무시하다. 등록된 기업만 3만 개에 달한다. 1인당 기업 수에서 세계 최고다. 소비자들의 깐깐함은 전 세계 비할 데가 없다. 소비자 경험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하고, 그 변화에 맞춰 방향을 바꿔야 살아남는다. K뷰티 기업이 세계를 호령하는 것은 요행이 아니다.
에이피알 사례를 보다 보니 요즘 잘나간다는 K방산에서도 그 눈부신 속도로 130년이 넘는 기업과 맞서 이긴 회사가 떠오른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다. 2년 전 호주 정부가 장갑차 도입 계획을 밝혔을 때 한화에어로가 끼어들 틈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 분야엔 이미 록히드마틴, 제너럴다이내믹스와 같은 100년 넘은 ‘고인물’이 가득했다. 특히 전차와 장갑차 분야는 136년의 역사를 가진 ‘독일 전차’의 본산 라인메탈이 장악하고 있었다. 호주가 장갑차 요구 사양을 제시했을 때, 전문가들은 세계에서 라인메탈만이 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장갑차 시제품조차 없던 한화에어로는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세계 곳곳에서 부품을 찾아내 ‘세상에 없던’ 장갑차를 만들어냈다.
글로벌 산업 체계와 통상 질서의 시곗바늘은 점점 빨라진다. 소비자들의 기호는 변화무쌍하다. 그 속도를 따라잡는 기업이 이긴다. K뷰티와 K방산, K푸드 분야에서 약진하는 우리 기업들의 모습이 지금 그렇다. 요즘 많은 주력 제조업 분야 기업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고전하는 가운데 다른 한쪽에서 이렇게 세차게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는 기업들이 출현하는 게 반갑다. 무모하다 싶은 실행력과 속도전은 원래 우리 기업들의 주특기였다. 1970년대 처음 조선업에, 반도체산업에 뛰어들 때부터 그랬다. 그 DNA가 우리 기업들을 각성시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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