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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작가가 꽃피운 33편의 미니픽션

입력 2025-08-18 20:37  


20여 년 전부터 뜻을 함께해 온 소설 동인 9명이 짧은 소설 33편을 묶은 작품집 <시간을 빌리는 사람>(나무와숲 펴냄)을 출간했다.

참여 작가는 ‘뒷북’ 동인으로 활동 중인 구자명 김의규 김저운 김혁 배명희 송언 정의연 최서윤 한상준 씨.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빛깔을 지니고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의 큰 그림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바람장미’에 비유한다. ‘바람장미’는 기상 전문 용어로 어떤 지점에서 일정한 기간 바람의 방향을 관측해 그 분포를 나타낸 그림을 말한다. 이를 계속 그려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송이 꽃 모양을 갖추게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동안 선보인 <그와 함께 산다는 것>, <롤러코스터>, <사람의 마음, 귀신의 마음>, <그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작업에서도 각각의 연륜과 패기에 걸맞은 작품으로 ‘바람장미’를 그려 보인다.

표제작 ‘시간을 빌리는 사람’은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배명희 씨의 작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젊은 남자가 집에서 나오는 장면을 본 주인공이 그 남자의 정체를 빍히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막상 그와 코를 맞대고 서니, 당혹스러웠다. 어머니와 어떤 사이냐고 물으려던 내가 그렇게 유치할 수 없었다. 지금껏 받은 교육과 상식, 나를 빚어 온 자존과 허위의식까지 모든 게 나를 공격했다. 이렇게 쉽게 내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나를 마구 흔들었다.’

그 남자는 자신을 ‘시간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주인공은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말이 없어도 편안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까지 없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는 사람’과 ‘시간을 빌리는 사람’이라는 기묘한 구도를 통해 마음의 평화마저 돈으로 사야 하는 관계의 소외, 관계의 실종 등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맨 앞에 나오는 작가는 구자명 씨다. 구 씨는 구상(1919~2004) 시인의 딸이다. 2023년 연작장편 <건달바 지대평>으로 동인문학상 최종심에 올랐다. 이번 수록작 네 편 중 ‘비루와 남루 사이’는 돈의 속성을 ‘비루’와 ‘남루’라는 단어로 비춘 작품이다. 사흘 후 갚겠다며 돈을 빌려 간 뒤 계속 갚지 않는 대학 선배가 “내가 요새 좀 몰려 있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 며칠만, 딱 며칠만 더 봐주라, 응?” 하며 눈썹을 팔자로 찌푸린 채 웃어 보였을 때 그녀는 비정한 사채업자가 된 것처럼 초라해진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비루와 남루 사이… 우리 각자의 삶은 어디쯤일까’를 되묻는 장면이 애잔하다.

두 번째로 실린 작가 김의규 씨는 구상 시인의 사위이자 구자명 씨의 남편이며, 화가와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 씨의 작품 네 편 중 두 편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바퀴벌레인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출현한 지 10만 년밖에 안 된 인간과 3억 5천만 년 된 우리 사이에 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감히 알겠는가? 해충이라고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제9회 불꽃문학상을 받은 김저운 씨는 ‘엔의 그네’를 통해 이주 여성의 생존 현실을 그린다. ‘나’는 다문화 가정 교육에도 잘 참여하지 않고 대화를 해보려 해도 틈을 주지 않는 엔을 보고 속으로는 은근히 무시하고, ‘왜 저들은 저토록 무기력하고 무덤덤할까?’ 의문을 품는다. 그러다 가난과 사회적 냉대,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스스로 무디어지는 연습을 수없이 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혁 씨의 ‘개는 언제부터 개가 되었나’는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작품이다. 대학 시절 민주투사였던 G가 반대 진영에 몸담고 정반대 주장을 펼치며 요직을 도맡다가 국제세미나 참석 후 귀국하는 공항에서 마약 탐지견의 수색에 걸려 곤경을 치르는 과정을 위트있게 그렸다.

동화작가로도 유명한 송언 씨의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는 중장년 아줌마들과 할머니들이 문화센터 신입 여자 수강생을 새끼 품듯 보살펴 주다가 어리숙한 숙맥인 줄 알고 타박하던 중 서울대 나오고 외교부 5급 공무원이란 이야기를 듣고 태도가 돌변하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지난해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의 트라우마를 다룬 장편소설 <롱빈의 시간>으로 주목받은 정의연 씨의 ‘고수’는 생의 의욕을 송두리째 잃고 고민하던 주인공이 우연히 삶의 마지막 예식을 치르고 돌이 든 배낭을 메고 바다로 들어가는 남자와 여자를 발견한 뒤 겪는 내적 갈등을 그렸다.

최서윤 씨의 ‘노란 부표가 있던 풍경’은 남의 사정을 잘 헤아리던 친구가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추억의 남항진 바다를 찾아가는 친구들의 여행을 애틋하게 그렸다.

한상준 씨의 ‘‘바다’를 품다’는 12·3 비상계엄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10대 때의 5·18 트라우마가 있는 훈영이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에 난입한 군인들을 보고 극도의 불안에 시달린다. 그를 사랑하는 ‘나’는 비상계엄의 충격과 소설을 포기했던 회한까지 겹쳐 고통스러워하는 훈영을 바다를 품듯 위로한다.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짧지만 그 속에 담긴 여운은 길다. 표면적으로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담은 듯해도 내면에는 인간과 사물, 시간과 관계, 선택과 기억이라는 주제들이 깊게 스며 있기 때문이다. 바쁜 현대인에게 딱 맞는 속도감을 제공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찬찬히 되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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