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시대의 가속화와 함께 ‘사람’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인력의 많고 적음보다 어떤 역량을 갖춘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얼마나 몰입하고 성장하는지가 미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적자본이 새로운 성장축으로 자리 잡은 지금, 정부는 그 중요성을 인식해 체계적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더 이상 기업만의 과제로 둘 수는 없다. 사람에 대한 투자와 공시, 정책 설계는 이제 글로벌 표준이자 국가경쟁력의 척도가 되었으며, 단순한 노동 정책을 넘어 경제 정책의 핵심축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1. 인적자본 공시, ‘가시성’ 확보가 출발점
정부가 인적자본에 주목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가시화하는 작업, 즉 공시 체계 정립이다. 인적자본은 자산처럼 다뤄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업의 재무제표에는 사람에 대한 투자와 성과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미국은 2020년부터 SEC(증권거래위원회) 차원에서 상장사에 인적자본 공시를 의무화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구 페이스북), GM, 애플 등은 직원 수, 이직률, 다양성, 훈련 시간, 직원당 교육비, 리더십 다양성 등의 항목을 구체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2021년 기준 미국 스탠더드앤푸어스(S&P) 500 기업 중 약 60%가 이직률과 직원당 교육 시간을 공시했으며, ESG 투자자의 기업 평가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투자자에게 지속가능경영 판단의 근거가 되고, 구직자에게는 ‘좋은 일자리’ 선택의 지표가 되며, 기업에는 스스로를 진단하고 개선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실제로 인적자본 공시를 강화한 기업일수록 주가 안정성과 조직 내 이직률 개선 효과가 높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인적자본 공시의 국제기준인 ISO 30414의 개정이다. 이 표준은 국제표준화기구(ISO)에 의해 2018년 처음 발표됐고, 9월에 이탈리아 밀라노 총회에서 개정판이 발표될 예정이다. 개정판의 가장 큰 핵심은 2가지다. 첫째, 공시 지표가 기존 58개에서 69개로 11개 증가했다. 둘째, 이 중 14개 지표가 기업 규모와 무관하게 대기업·중소기업 모두의 ‘필수 공시’ 항목으로 지정됐다는 사실이다. 14개 필수 공시 항목 중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업의 태도’를 드러내는 항목이다. 예컨대 남녀 간 임금 격차, 경영진과 일반 직원 간 임금 격차, 인권침해 사례 수 및 유형, 사회적 약자의 이직률과 교육 기회 제공 현황, 산업재해 발생률 및 사망률 등이다. 이는 단순한 인사 통계를 넘어 기업의 사회적책임 수준을 드러내는 척도이자 현 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우선, 이런 글로벌 트렌드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은 2022년 ‘인적자본 가시화 지침’을 제정하고, 경제산업성과 금융청이 중심이 되어 기업의 인재 정보 공시를 공식화했다. 히타치, 미쓰비시UFJ, 파나소닉 등은 이 지침에 따라 내부 인재 이동률, 교육훈련 투자, 다양성 확보 현황 등을 공시하고 있으며, 경영전략과 인재전략의 연계성도 설명하고 있다. 2023년부터는 도쿄증권거래소 프라임시장 상장사에 사실상 인적자본 공시가 의무화되면서 공시 수준이 크게 향상됐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국제 가이드라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향후 글로벌 공급망과 ESG 평가 기준, 투자자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축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ISO 30414는 단순히 대기업용 도구가 아니라 모든 규모의 기업에 적용 가능한 ‘사람 중심 경영’의 나침반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다는 점에서 정부 차원의 표준 채택 및 확산 정책이 시급하다.
2. 인적자본 정책, 교육과 고용을 넘어 ‘삶과 성장’으로
정부의 인적자본 전략은 단순히 고용률 제고나 교육훈련 기회 제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경력 개발, 일과 삶의 균형, 조직문화, 기술 적응력, 사회적 신뢰 회복 등까지 포괄하는 전방위적 정책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정책은 주로 구직자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재직자와 중장기 경력자, 중소기업 종사자와 고령 인력까지 포괄해야 한다. 특히 인재 순환이 빠른 산업일수록 지속적 역량 갱신을 위한 정책적 설계가 중요하다.
핀란드는 ‘스킬 매핑(skill mapping)’이라는 국가 차원의 기술 수요 예측 시스템을 운영한다. 이를 통해 산업별 필요 역량과 시민의 현재 기술 수준을 연결하고, 적합한 훈련·직업 경로를 안내한다. 일본은 ‘리스킬링(Reskilling) 지원법’을 제정해 직장 내 전환 교육과 디지털 전환 적응 훈련을 국가 차원에서 운영 중이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대부분 인력 개발 정책이 기업 밖에 있는 비정규직이나 취업 준비생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재교육 및 재설계 프로그램은 극히 제한적이다.
정부가 추진할 수 있는 확장 전략은 다음과 같다.
① 중소기업의 학습 역량을 보완하기 위한 공동 교육 플랫폼 운영과 산업단지 기반의 학습센터 설립
② 경력 개발 이정표를 설계한 ‘직무 경로 기반 성장 지도(K-career path map)’ 제공
③ 직장 내 학습 문화 진단 시스템을 도입해 기업의 인재 개발 여건 진단 및 피드백
이 3가지 전략은 단기적 직무 적응을 넘어 경력 생애주기 전반을 아우르는 구조적 개입으로 확장될 수 있다.

3. 인적자본 보고 체계와 데이터 아카이브 구축
정책의 성공은 설계가 아닌, 평가와 고도화에 달려 있다. 인적자본은 장기 성과와 질적 변화가 중요하므로, 이를 뒷받침할 데이터 인프라가 필요하다. 싱가포르는 스킬즈퓨처(SkillsFuture) 정책을 통해 산업별 수요, 시민별 학습 과정, 지역별 격차를 분석한 〈국가 인적자본〉 보고서를 매년 발간하고, 이를 정책 설계와 예산 반영에 활용한다. 데이터를 단지 기록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통해 직무 역량 체계를 제공하지만, 실제 기업과의 연계성과 활용도는 매우 낮다. 정부는 ▲산업·지역·직무별 HR 데이터를 통합한 ‘국가 인적자본 대시보드’ 구축 ▲공공기관의 ISO 30414 기반 보고서 작성 의무화 ▲기업 자발 공시를 위한 인센티브 제도 마련 등을 추진해야 한다. 민간의 데이터를 활용해 국가 차원의 HR 전략을 수립하고, 다시 기업에 가이드라인으로 제공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4. ESG와 연계된 인적자본 전략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가 전 세계적으로 강화되면서 인적자본은 ‘S(social)’ 항목의 핵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속가능성회계기준위원회(SASB, 미국),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 영국), 유럽재무보고자문그룹(EFRAG) 등은 공통적으로 인권, 다양성, 교육, 산재, 노동 조건을 주요 평가 항목에 포함한다. 이는 단지 비재무적 성과를 넘어 장기투자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신호로 인식된다.
우리도 K-ESG 지표를 통해 인적자본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자가진단과 경영 개선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 현재 ESG 공시는 자산 기준, 상장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하루빨리 중견기업과 민간 전반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ESG 공시와 ISO 30414 기반 인적자본 공시를 연계한 통합 공시 프레임워크를 구축하고, 중소기업에는 ESG 역량 진단과 교육·컨설팅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 특히 산재 발생률, 임금 격차, 인권 이슈 등은 ESG와 ISO 30414 양쪽 모두에서 중시하는 평가 항목으로, 기업의 리스크 관리와 사회적 신뢰 확보를 위해 반드시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할 핵심 지표다.
5. 성과 평가와 정책 환류 체계의 마련
인적자본 정책은 성과가 단기간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정교한 성과 추적과 피드백 시스템이 필요하다. 단순한 교육 수료율이나 참여율이 아닌 실제 업무 역량의 향상과 직무 전환, 고용 안정성, 근속 연수 증가 등 중장기 효과까지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덴마크는 평생학습 정책 효과를 5년 단위로 추적하며, 참여자의 직무 이동 급여 수준과 고용 안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한국도 이에 준하는 장기 추적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정부는 ‘정책 기반의 인적자본 ROI(Return on Investment)’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예산 편성, 신규 정책 도입, 기업 지원사업에 직접 반영해야 한다. 성과에 기반한 피드백 구조 없이는 정책도, 공시도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사람 중심 경쟁력, 이제 국정 과제로
앞으로 국가경쟁력은 자원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사람 중심’ 구호를 외치지만 정책은 여전히 기술, 장비 중심이다. 진정한 변화는 사람을 숫자가 아니라 자산으로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인적자본 공시를 더 이상 기업의 선택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제도화하고 확산해야 한다. 투명한 정보공개, 지속가능한 성장 경로, 성과에 따른 지원이 핵심 원칙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수치로 드러날 때 국가경쟁력은 비로소 힘을 얻는다. 이제 “미래는 인적자본 공시에서 시작된다”고 선언할 때다.
신경수 지속성장연구소(SGI)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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