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려한 폭포를 연상케 하는 물줄기, 거대한 빗물이 매끄러운 암석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듯한 광경.
자연 풍광이 아니다. 한때 부부였던 카녜이 웨스트(예·YE)와 킴 카다시안의 캘리포니아 저택에 설치된 수전 얘기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카녜이 웨스트는 벨기에 건축가 악셀 베르보르트에게 1455㎡ 면적에 달하는 집의 리모델링을 맡겼는데, 수도원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나 수억 원을 호가하는 가구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암석 같은 수전과 싱크였다. 미니멀한 공간을 완성하는 마지막 '디자이너의 터치'였다. 그야말로 '디테일'의 끝판왕 같은, 공간 인테리어의 정점이었다.

공간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은 최근 디테일로 향하고 있다. 특히 주방 공간에서는 수전과 이를 포함한 싱크가 차별화를 결정짓는다. 흔히 말하는 '럭셔리 주방'의 필수 요소로 수전의 소재와 기능 혹은 브랜드를 따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최근 더 파크사이드 용산, 에테르노 청담 등 고급 주거 공간을 비롯해 안다즈 호텔, 남해 사우스케이프, 제이드팰리스 CC 등에 설치된 이탈리아 하이엔드 수전 브랜드 제시(Gessi)가 대표적 예다. 포시즌스 호텔, 시그니엘 서울은 물론 9월에 문을 여는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 설치된 독일 프리미엄 욕실&주방 브랜드 한스그로헤(Hansgrohe) 등 유럽의 럭셔리 수전 브랜드들이 고급 주거의 차별화 요소로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밖에도 볼라(Vola), 판티니(Fantini) 등이 최근 주목받고 있는 하이엔드 수전 브랜드다.

주방에서 하이엔드 수전의 등장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아일랜드 식탁이다. 공용 공간인 거실과 주방의 경계선이 사라지며 주방이 개방된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아일랜드 식탁이 생기면서 보이는 주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싱크와 수전을 디자인 측면에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비하우스(B-House) 김지영 대표의 얘기다.
주거의 고급화도 하이엔드 수전 수요를 높인 원인으로 꼽힌다. 제시를 수입·판매하는 한샘넥서스의 정동일 특판사업실 영업3팀장은 “하이엔드 수전에 대한 관심은 고급 주거 차별화 전략의 중요한 요소이자 소비자의 개별적인 라이프스타일 니즈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나만의 럭셔리하고 미니멀한 주방을 완성하려는 수요가 바로 수전을 한 끗 다른 공간 구성요소로 만든 셈이다. 큼지막한 주방 가구를 럭셔리한 제품으로 갖춰놓은 뒤 이 공간의 미적 완성도를 마무리하는 마침표 같은 역할이 바로 수전이다. 그 한 끗의 차이는 결국 감도를 높이는 데 있다. 하이엔드 가구나 소품처럼 어떤 수전을 쓰느냐가 사용자의 감각을 보여주고, 이것이 공간의 오브제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는 얘기다.

배혜지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꼴(Kkol) 공동대표는 "하이엔드 수전은 유명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하고 작가와 콜라보 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래서 수전을 마치 디자인 오브제나 작품을 구매하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많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하이엔드 수전은 분사 각도나 물을 튀기는 정도 등 단순히 물이 잘 나오는 기능을 넘어 차별화된 '디테일 기술'을 더했다. 소비자 사용성을 반영한 맞춤형 디자인에 충실한 것도 큰 특징이다. 멀티태스킹에 최적화된 3가지 분사 방식을 가진 한스그로헤의 아쿠노 셀렉트 M81, 우븐 메탈 디자인으로 인체공학적 사용감을 가진 제시의 인베르소 컬렉션 등 하이엔드 수전은 기능과 디자인 그리고 디테일한 사용감에 가장 큰 차별점을 둔다.

최근 수전 디자인 트렌드는 볼트의 조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미니멀한 형태가 대세다. 벽에 매립되는 형태는 물론 흔히 ‘자바라’라 칭하는 목 부분이 없는 디자인, 선이 없는 샤워기 등 형태와 사용성이 한층 다양해졌다. 여기에 컬러 수전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졌다. 손상현 한스그로헤 한국지사장에 따르면 최근에는 이전의 크롬이나 골드 같은 일반적인 선택지보다 니켈과 브론즈 소재에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컬러를 수전을 찾는 소비자가 확연히 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하이엔드 수전 브랜드는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서 먼저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경우 오래된 공간의 리노베이션이 많고, 자신의 공간에 수전이나 콘센트, 손잡이까지 일일이 소비자가 관여해 설치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국내에서 개인 주거용 공간에 하이엔드 수전을 사용하는 일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 설치나 사후 관리 등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강남이나 용산, 여의도 등 고급 주거지를 중심으로 하이엔드 수전 브랜드 수요가 더 늘고 있다. 수전이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맞춤형 시스템과 시공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충분한 수요가 뒷받침돼야 사후 관리까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무조건 하이엔드 브랜드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알고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개인 주거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주방 사용 습관은 물론 자신에게 벽 매립 스타일이 맞는지, 샤워기는 버튼만 노출하고 싶은지, 온도 표시가 좀 더 드러나면 좋을지 등 자신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하이엔드 수전은 일반 수전 가격에 비해 평균 10배 이상 차이가 날 만큼 비용도 비싸고, 사후관리 측면에서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기 때문에 브랜드 전문 업체나 디자이너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실제로 한 개인 클라이언트가 유럽의 하이엔드 수전을 사용하려다 국내 설치 부품이 맞지 않아 사용하지 못한 경우도 여럿 있었다. 국내에 맞는 수질 관련 인증 마크도 필요한데 개인 차원에서 이를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
더운물만 잘 나오면 됐던 수전은 이제 디자인적 오브제의 역할은 물론, 사용자와 사용 환경에 맞는 맞춤형 기능으로 주방 경험을 더욱 입체적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 수전이나 과일 세척용 분사, 거품형 분사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제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선두에 있는 하이엔드 수전의 핵심은 기능에 더해 공간의 인상을 좌우하는 디자인의 정점으로 점차 그 존재감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더 알고 싶은 하이엔드 수전에 관한 Q&A>
▶ 하이엔드 수전에 관심이 많은 고객의 공통된 성향이 있는가.
"자신의 취향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해외 브랜드에 대한 정보도 많기 때문에 더욱 자신의 스타일을 찾기 수월해졌다. 물론 이때는 특정 브랜드에 대한 논의보다는 자신의 생활 습관이나 성향, 원하는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를 더 적극적으로 나누는 편이다."-배혜지 디자인 스튜디오 꼴 공동 대표
▶ 수전을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
"소비자마다 선호하는 디자인과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우선 사용하려는 욕실 또는 주방 환경에 적합한 제품을 추천받고, 숙련된 기술자를 통해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다."-손상현 한스그로헤 한국지사 지사장
▶ 하이엔드 수전으로 공간을 구성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있나.
"공간의 톤 앤드 매너에 얼마나 맞는지, 수전이 해당 공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용자 라이프스타일이 가장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커스터마이징, 오더메이드 시스템이기 때문에 제품을 받는 데에 6개월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설계 단계부터 계획하는 것이 좋다."-김지영 디자인 스튜디오 비하우스 대표
▶ 하이엔드 수전 제품 선택 시 주의할 점이 있다면?
"기본적인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면 좋다. 무독성 실리콘 노즐이 좋고, 주방 수전의 경우 물이 잘 안 튀기면서 식기를 빠르게 씻을 수 있는 공기 배합률이 좋은 제품을 골라야 한다. 또 도장 제품보단 PVD 도금 제품이 내구성 면에서 우수하다."-정동일 한샘넥서스 특판사업실 영업3팀 팀장

오상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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