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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그림자의 섬’에 가고 싶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입력 2025-08-21 15:19   수정 2025-08-22 08:51

그림자의 섬
김구슬

그림자 섬 영도(影島),
분홍 대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작은 풀꽃 가득한 정원에 스민 차가운
물기는
진한 핑크빛 독일 장미의
관능을 씻어내고,
벽에 걸린 톨스토이의 노자적 표정은
초록 풀들의 속삭임을 금한다.

차가움과 뜨거움,
움직임과 정지의 교란 사이에
황홀한
푸른 식탁이 펼쳐진다.

진지한 런치 후의
담백한 티 타임,

‘천 권 시집의 집’
카페 ‘영도일보’는
극지와 열대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구현한
‘그림자의 섬’이다.

-----------------------------

이 시에 나오는 영도(影島)는 특이하게 ‘그림자 영(影)’ 자를 이름에 씁니다. 왜 그럴까요?
부산 앞바다 섬 영도는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 국가가 경영하는 말 목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자란 말이 워낙 빨라 그림자(影)가 끊어져(絶)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달리는 말의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는 이야기는 이 시의 ‘그림자’ 모티브와 연결됩니다. 그림자는 실체와 함께 있지만 실체와 다른 차원의 존재이지요. 영도라는 섬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영도는 지도 위의 한 섬일 뿐만 아니라 땅과 바다, 과거와 현재, 전쟁과 피란, 생과 사를 잇는 역사적 기억의 교차로입니다.

한때 부산은 임시수도가 있는 최후의 보루였고, 영도다리는 배가 지나갈 때마다 상판 한쪽을 들어 올리는 명물이었습니다. 생이별한 이산가족들이 재회하고 또 절망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던 현대사의 현장이지요. 그래서 ‘만남의 다리’이자 ‘이별의 다리’였습니다. 그만큼 사연이 많고 문학적 은유와 상징도 풍부합니다.

김구슬 시인의 ‘그림자의 섬’은 최근 나온 시집의 표제작인데, 시집 속에 영도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묘박지’라는 시에도 “어린 시절 듣던 영도다리의 사연들이/ 이제 대교 저 높이 걸려 있다”, “배들은,/ 부두도 아니고 뱃길도 아닌 곳에서/ 부동도 움직임도 아닌 상태로/ 닻을 내리고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구절이 아주 성찰적입니다. “우리도, 죽음과 탄생 사이에서/ 부름을 기다리며/ 외롭게 서성이고 있다.// ‘영도다리 아래서 만나자’던/ 피난민들의 애잔한 삶이 서린/ 만남의 거점,// 그 역사처럼/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무심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제 영도는 대한민국에서 인구밀도가 제일 높은 섬이 됐습니다. 서울 여의도와 비슷하지요. 최근에는 유명 카페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바다 전망이 해운대나 광안리와 다르고, 항구에 정박 중인 배와 바다 위의 ‘묘박지’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냅니다. 이 시에 나오는 카페 ‘영도일보’도 그중 한 곳입니다.

시 ‘그림자의 섬’은 카페에 들어서는 방문객의 시선을 따라 “분홍 대문”과 “풀꽃 정원”, “핑크 장미” 같은 감각적 색채를 보여주면서 이 이미지를 차가움과 뜨거움, 움직임과 정지, 극지와 열대라는 상반된 속성의 ‘교란’과 ‘조화’의 이중 장치로 엮어냅니다. 이 상반성을 대립이 아닌 긴장과 균형의 힘으로 전환하며, 시 속의 공간을 “황홀한 푸른 식탁”으로 펼쳐 보입니다. 그 순간 한 점의 섬이 커다란 세계로 증폭되는 경계의 전환이 이뤄집니다.

그러고 보니 김구슬 시인의 고향도 바닷가입니다. 지금은 창원시로 편입된 경남 진해이지요. 그의 아버지는 시인이자 한학자인 월하 김달진(金達鎭, 1907~1989)입니다. 김달진 시인은 22세에 <문예공론>으로 등단한 이후 한국 시의 정신주의적 세계를 확립했습니다. 후학들은 그를 기려 김달진문학상을 제정하고, 해마다 진해에 있는 생가에서 김달진문학제와 함께 시상식을 엽니다.

저도 2024년 김달진문학상을 받으면서 문학제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때 수상소감에서 김달진 시인의 ‘샘물’을 이야기한 기억이 납니다.
“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았다.”

작은 샘물이 하늘과 바다로 무한히 넓어지는 풍경과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아 보는 시인의 모습을 이토록 담박하게 그릴 수 있다니! 숲속 샘물을 둥근 지구와 우주의 섬으로 치환하는 감각이 놀랍고도 경쾌했습니다. 티끌과 우주, 찰나와 영겁의 합일이라고 할까요.

그 시의 감각과 닮은 시를 이번 시집에 실린 김구슬 시인의 ‘물방울’에서 발견했습니다.

도처에 물기가 스며있는데
우리는 왜 매 순간 목마름으로 지쳐가는가?
인색한 샘물이여!

인생은
부유하는 습기 사이를 떠돌다
오로지 작은 물방울 하나
맺기 위한 기나긴 유랑이다.

떠도는 물기가 별안간 멈출 때
비로소 방울져 내리듯
지상에서 삶의 짐 벗어버릴 때
하나의 물방울로 남겠지.

우리는 말없이 기다린다.

.....

어느 날 아침 비로소 보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풀잎 사이에서
작은 이슬 하나
파르르 떨며
지상의 무게 떨치고
텅 빈 물방울로
방울져 내리는 것을.


이 시는 “도처에 물기가 스며있는데/ 우리는 왜 매 순간 목마름으로 지쳐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는 우리 인생을 "작은 물방울 하나/ 맺기 위한 기나긴 유랑"으로 정의합니다. 물방울은 완성된 순간이자 소멸의 순간이며, 존재가 자신을 벗어놓는 해방의 순간입니다. 풀잎 사이에서 햇살에 반짝이며 "파르르 떨"다가 "텅 빈 물방울로/ 방울져 내리는" 모습은, 존재가 모든 짐을 벗고 순수한 형태로 환원되는 영적 이미지로 읽힙니다.

이런 이미지들은 김달진 시인의 ‘샘물’에서 발견되는 ‘작은 샘물이 바다로 확장되는’ 감각과도 연결됩니다. 작은 샘물 속에 하늘과 바다, 바람이 깃들 듯이 작은 물방울 속에도 삶과 죽음, 우주적 질서가 내재하지요. 이는 김구슬 시학의 미시적 사유와 거시적 통찰이 맞닿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영도와 그림자, 분홍 대문과 풀꽃 정원, 푸른 식탁 사이에서 “진지한 런치 후의/ 담백한 티 타임”을 즐기면서 “극지와 열대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구현한/ ‘그림자의 섬’”을 완성하는 과정도 그 경계의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시 속의 영도는 지리적 물리적 공간이면서 시인의 내면 풍경과 세계의 현주소를 비추는 축약판입니다. 바다는 끊임없이 밀려오고 물러가며 시간을 새기고, 섬은 그 흐름을 받아내는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의 터를 일굽니다. 바로 그 현장, 카페 ‘영도일보’에서 시인이 현상과 그림자, 움직임과 정지의 변증법을 아우르며 “풀꽃 가득한 정원”, “진한 핑크빛” 장미를 피워 올리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곳 ‘그림자의 섬’에 가 보고 싶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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