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경제가 비틀거린 지는 제법 오래됐지만 요즘엔 경고음이 부쩍 자주 들리고, 데시벨도 높아졌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럽이 생존 위기에 직면했다”고 했고, ‘월가 황제’ 제이미 다이먼은 “당신들은 지고 있다”고 유럽을 직격했다.선진 경제의 두 축인 미국과 유럽을 비교하면 그 이유가 한눈에 들어온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유로존 경제 성장률은 지난해 0.9%였다. 올해도 0%대 탈출을 장담하기 어렵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3년째 역성장 위기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올해 잘해야 경제 규모가 0.5~0.6% 커질 전망이다.
반면 미국은 지난해 2.8% 성장했고 올해는 2% 가까운 성장이 예상된다. ‘트럼프발 관세 충격’에도 그렇다. 미국은 독일보다 경제 규모가 6배 이상, 프랑스보다 9배 이상 크다. 그런 미국의 고속 성장은 항공모함이 구축함이나 순양함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과 유럽의 경제력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유럽이 유럽연합(EU)으로 뭉쳤을 때가 1993년이다. 당시 EU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과 비슷했는데 지금은 미국의 3분의 2 수준에 그친다. 세계 경제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도 이 기간 26%에서 17% 정도로 낮아졌다.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이 부상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싶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비중은 그때나 지금이나 26~27%로 별반 다르지 않다. 유럽이 상대적으로 쇠퇴한 것이다. 미국인은 평균적으로 유럽인보다 잘산다.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작년 기준 미국이 7만5500달러, 유로존이 5만6300달러 정도다. 첨단 산업을 주름잡는 기업도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아마존 등 여전히 미국 기업이 압도적으로 많다. 화웨이, CATL, BYD 같은 중국 기업도 무섭게 치고 올라온다. 인공지능(AI)산업에서 오픈AI, 구글 등 미국 기업이 종횡무진하고 중국도 딥시크 같은 스타트업이 가성비 모델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유럽에선 남의 나라 얘기다. 미국 경제는 역동적이고 파괴적 혁신이 수시로 일어나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다.
유럽 경제의 정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85년 독일 경제학자 헤르베르트 기어슈는 1970~1980년대 유럽 경제의 부진을 보며 ‘유럽경화증(Eurosclerosis)’이라고 진단했다. 과도한 복지와 규제, 경직된 노동시장, 높은 세금 탓에 유럽 경제가 동맥경화증(arteriosclerosis)에 걸린 것처럼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40년이 흘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진단은 비슷한 것 같다.
가령 영국 스코틀랜드전력은 국내에서 송전선을 허가받는 데만 12년이나 걸렸다. 런던 템스강 아래 새로운 터널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인허가에만 3억4000만달러가 지출됐는데 문서 분량만 35만9000쪽에 달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소개한 유럽의 관료주의와 레드 테이프 사례다. ‘미국은 혁신하고, 중국은 모방하고, 유럽은 규제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곡을 찌른다. 값비싼 에너지 가격도 유럽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산업용 전기 요금을 미국과 비교하면 영국은 4배, 독일과 프랑스는 3배나 된다. 싸고 안정적인 전기를 찾아 유럽을 떠나는 기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환경 규제는 유럽이 그 어느 나라보다 세다.
빠른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데 고용 유연성이 떨어져 기업이 신규 인력 채용을 꺼리는 것도 미국과 대비되는 유럽의 특징이다. 게다가 유럽은 정치적으로 불안하다. EU에만 27개국이 모여 있는 데다 최근엔 정치적 양극화까지 심해져 경제 개혁을 위한 정치적 합의가 어렵다. 물론 오랜 기간 유럽이 구축해온 복지국가 모델의 장점도 있다. 하지만 경제 활력이 떨어지면서 복지를 지탱할 힘이 약해지고 있다. 성장이 없으면 결국 복지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유럽의 모습은 한국과 오버랩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우리도 저출생·고령화로 복지 부담이 빠르게 늘고 있는데 노란봉투법처럼 기업 경쟁력을 옥죄는 규제가 겹겹이 쌓이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성은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다. 재생에너지 확대도 ‘과속 스캔들’이 우려될 정도로 빨라 기업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러다 한국도 ‘유럽경화증’에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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