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제프 요아힘이 초연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한스 폰 뷜로가 처음 선보인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명작이 소리로 탄생한 순간은 수 세기가 지나도 그 중요성이 퇴색되지 않는다. 단순히 곡 자체의 가치가 뛰어나서만은 아니다. 작곡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며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받은 연주자가 작품 속 의도를 깊이 고민하고, 세상에 없던 선율을 처음 만들어내는 무대는 후대에 어떤 비르투오소(virtuoso·기교가 뛰어난 연주자)가 등장해도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만약 초연을 맡는 인물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연주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지난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공연이 주목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미상, 디아파종상,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등 해외 주요 음악상을 휩쓴 ‘현의 대가’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54)이 자신과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에게 헌정된 작품을 들고 내한한다는 소식은 일찍부터 화제였다. 지난 4월 미국 카네기홀에서 세계 초연된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슬퍼할 때와 춤출 때’는 이날 세종솔로이스츠와 함께 아시아 초연됐다. 이스라엘 출신 작곡가 아브너 도만이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느낀 상실감과 애도의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날 길 샤함은 50대란 나이가 무색하게 잠시도 집중력과 여유를 잃지 않으며 무대를 장악해나갔다. 그는 아내 아델 앤서니(55)와 주제 선율을 긴밀한 호흡으로 주고받으면서 슬픔과 기쁨, 상실과 희망, 행복과 비애가 공존하는 이 작품의 이중적인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1, 3악장에선 공허한 음색과 절제된 표현으로 반음 하행하는 ‘한숨’ 모티브를 하나하나 정밀하게 조형하면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슬픔을 삼키는 이들의 애달픈 감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2, 4악장으로 전환될 때는 언제 애통한 감정이 있었냐는 듯 금세 춤곡의 리듬과 선율을 불러내며 극명한 명암 대비를 이뤄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박자, 악상, 강세, 셈여림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작품 전체의 뼈대가 되는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극적인 악상에 도달하면서 만들어내는 거대한 에너지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력, 희망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길 샤함의 존재감은 이날 함께 연주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에서도 돋보였다. 특히 활 테크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는 오른손 손가락과 손목은 거의 쓰지 않고 주로 팔 전체를 이용해 활을 곧게 밀고 당기며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고전적인 음색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바흐 특유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저음에선 거대한 대지를 뒤흔드는 듯한 묵직한 울림으로 귀를 사로잡았고, 고음에선 직선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명징한 음색으로 강한 호소력을 만들어냈다.

그는 비브라토, 보잉의 폭과 속도를 하나하나 치밀하게 계산해 연주하기보단 자신이 이해한 작품의 어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도약 구간에서도 전체의 균형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자신보다 음량이 다소 작은 편인 앤서니를 위해 후경을 맡을 땐 기꺼이 자신의 소리를 감추다가도, 전경에 자리할 땐 순식간에 단단한 응집력을 갖춘 연주로 입체감을 살려냈다. 과연 대가의 품격을 보여준 연주였다.
“제 일은 마치 작가의 글을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배우의 작업과도 같습니다. 새로운 작품에서 얻은 감동을 청중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작곡가의 정신을 파고드는 일에 집중하니까요.”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는 연주의 강한 설득력은 낯선 작품을 더는 낯설지 않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그를 ‘현의 대가’로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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