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 공연이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여성은 남성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조연이나 뮤즈 역할에 불과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 ‘베토벤’의 안토니 브렌타노, ‘웃는 남자’의 데아 등 숱한 여성 캐릭터가 그랬다. 이제는 극중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한층 다양해졌다. 여성 과학자, 의사 등 실존 인물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부터 여성 배우 혼자 무대를 책임지는 1인극까지 등장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비추는 작품을 살펴본다.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성폭행 피해자를 구제하지 못하는 사법 시스템의 모순을 꼬집는다. '프리마 파시'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법률 용어로 그럴 듯해 보이는 표면 상의 진실을 뜻한다. 실체적 진실보다 우선하는 법적 진실을 의미한다.
주인공인 변호사 테사 엔슬러는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남성을 전문으로 변호해 왔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성폭행 피해자가 되고 불합리한 법 체계에 맞서는 고독하지만 치열한 투쟁을 시작한다. 2019년 호주에서 초연한 뒤 런던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현지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1인극인 만큼 책임도, 스포트라이트도 한 명이 가져간다. 한국 초연 무대에는 이자람 김신록 차지연 등 각기 다른 매력의 실력파 배우 세 명이 오른다. 이자람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대본을 받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읽고 작품의 무게가 아주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며 “인생의 큰 도전이 찾아온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왔고, 사랑으로 이 땅에 남겠습니다.” 조선 말기,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이자 의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의 헌신적인 삶을 그린 ‘로제타’도 눈길을 끄는 여성 서사극이다. 홀 여사는 외국인 여성으로서 온갖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면서도 당시 유교 사상에 젖어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길 거부하는 조선인 여성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여성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데도 열정을 쏟았다.이 작품은 미국 유명 실험주의 극단 리빙시어터가 처음 내한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과 공동 제작한 아시아 협력작으로, 2023년 초연했다. 이번 무대에선 배우 김성령을 비롯해 한국 배우와 미국 배우 8명이 로제타를 번갈아 연기한다. 오는 31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네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뮤지컬 ‘마리 퀴리’도 실존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마리 퀴리는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해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세계적인 과학자다. 작품이 위인전처럼 사실만 나열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건에 상상을 더한 에피소드가 가미됐다. 마리의 친구 안느가 일하는 시계 공장에서 라듐에 노출된 여성 노동자들이 잇달아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로, 마리가 더 직접적으로 라듐 피해자와 마주하게 된다는 설정이다.
뮤지컬 ‘마리 퀴리’의 천세은 작가는 이를 통해 “마리 퀴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끝내 외면할 수 없던 인간적인 책임과 그 속에서 피어난 조용하고 단단한 연대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리 퀴리 역은 배우 김소향 옥주현 박혜나 김려원이 맡는다. 공연은 서울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10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뮤지컬 등 공연이 웃음을 주는 코미디를 넘어 삶과 사회에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장르로 진화하고 있다”며 “솜사탕 같은 러브스토리를 벗어나 여성의 주체적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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