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과 물감 대신 실로 그림을 그려온 일본의 작가 시오타 치하루의 개인전 ‘Return to Earth’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시오타의 세 번째 한국 개인전으로 지난해 일본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의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등 최근작부터 젊은 시절 그린 유화까지 다양한 작품을 소개한다. 지난 7월 말 전시 개막 전부터 상당수 작품이 판매될 정도로 컬렉터의 관심을 끌었다. 아파트에 주로 사는 한국 거주 문화 특성상 부피감이 큰 설치 작품이 인기 없다는 통념과 달리 프리즈 서울과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를 앞두고 총알을 장전하고 있던 컬렉터들이 일찌감치 지갑을 열었단 얘기다. 그만큼 삶과 죽음을 다루는 시오타의 예술 세계가 국내 미술 애호가에게도 공명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오타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그의 지난 생을 알아야 한다. 교토세이카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함부르크 조형대학과 베를린 예술대학 등 독일에서 유학한 시오타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며 실존적 고민에 빠졌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시오타는 두 번의 암 투병으로 생사를 오갔고, 항암 치료로 고통받았으며, 유산까지 겪었다. 누구보다 죽음에 다가섰던 그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됐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기억을 답으로 찾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암은 끝을 암시하는 듯한 침묵과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아이를 잃었다. 임신 6개월 차의 사산.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밖으로 나갈 수도, 세상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고통과 치유의 기억을 담아내는 예술 방식으로 실을 택한 건 필연적이다. 사람이 애착을 두고 사용하던 물건에 사람의 기억이 담긴다는 생각에서 시오타는 사물에 주목했고, 불현듯 실을 집어 들게 됐다. 실제로 시오타 하면 떠오르는 건 붉은 실을 칭칭 감아 만든 작업들이다. 붉은 실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등 동양 문화권에서 남녀의 사랑 등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연을 상징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Nokon kjem til aa komme(누군가가 올 것이다)’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놓인 구조물에 유독 선명하게 빨간 실이 연결돼 있다.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동명 작품에서 이름을 따왔다. 포세를 20년 넘게 연구해온 시오타의 막역한 친구가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나카노시마 미술관에서 선보인 ‘The Self in Others’(2024) 시리즈에도 붉은 실이 칭칭 감겼다. 병원이나 해부학 책에 나오는 인체 모형이 붉은 실과 검은 실을 뒤집어쓴 형상이다. 분명 사람과 동일한 형태의 신체 구조를 지녔지만, 이질적이라고 느끼는 감각이 작업의 출발점이다. 일본을 떠나 타국에서 활동하며 이방인처럼 사는 자신의 존재가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 스스로가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간다는 그런 감각을 형상화했다.‘Cell’(2025) 연작은 2017년 암이 재발한 뒤 항암 치료를 받으며 죽음과 마주한 시오타의 경험을 녹여낸 작품이다. 셀(Cell)은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다. 그리고 이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해 자신을 파괴하는 암으로 변한다. 이 짧은 사실에서 시오타는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사유했다고 한다. 작품은 마치 심장 등 인간의 장기를 연상시키는데, 작품에 사용한 유리와 철사는 단단해 보이지만 열 및 압력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유연한 재료라는 게 재밌다. 이를 통해 시오타는 고통 속에서도 재생과 순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Landscape’(1992) 연작이다. 대학 시절 제작한 시오타의 초기 회화 작품이다. 현재 5점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중 3점이 걸렸다. 이 회화는 시오타가 설치와 조각에 눈을 돌리는 시발점이 됐다. 회화에 재능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전시장에서 만난 시오타는 이렇게 말했다. “유화를 그리는 걸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모방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림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에 ‘멈춰야겠다’ 싶었죠. 이 전시는 내가 왜 회화를 멈췄고, 실로 전환했는지를 재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유화도 공개했습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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