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증권사들이 무서운 속도로 덩치를 키우면서 금융산업의 판을 흔들고 있다. 어느새 증권업 전체 자기자본은 100조원을 돌파하며 4대 시중은행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자기자본은 총자산에서 부채를 제외한 금액으로, 기업의 신용도와 재무 안정성을 판단하는 척도다. 금융투자회사엔 링 위의 '체급'을 결정한다. 자기자본 3조원 이상인 증권사는 기업 신용공여가 가능하고 4조원을 넘어서면 자기자본의 두배 한도로 발행어음을 찍을 수 있다. 올해 들어서는 종합투자계좌(IMA) 사업 요건(자기자본 8조원)을 따내기 위해 앞다퉈 증자에 나서는 등 증권사 간 몸집 불리기 경쟁이 한층 격화하고 있다.
이렇게 불린 자기자본을 무기로 증권사들은 과감히 투자에 나서고 있다. 자기자본이 많으면 인수합병(M&A)이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초대형 글로벌 딜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권'을 얻을 수 있다. 신용등급이 높아져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여력도 생긴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동시에 업그레이드되는 셈이다.
증권사들이 체급을 올린 덕분에 자기자본 투자(PI) 방식과 규모도 진화했다. 그동안 공모주나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메자닌 채권에 수십억~수백원 어치씩 투자해 수익을 올렸다면 최근엔 기업 인수금융(M&A용 대출)과 공동대출(신디케이션)에 수천억~수조원씩 베팅하며 은행, 보험사, 연기금 등 '큰손'들과 직접 경쟁하고 있다. 메리츠증권이 지난 7월 5조원 규모의 SK이노베이션 자산 유동화 딜에 참여해 단독으로 자금을 집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메리츠증권은 연 7%대 금리로 후순위 6000억원을 직접 인수해 주목받았다. 한화솔루션, 신세계건설 등도 증권사들이 자체 운용 한도(북)를 활용해 6~7%대 금리를 받고 사모 영구채를 인수했다.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덩치가 커지고 웬만한 투자 손실을 감내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자 단순히 주식 발행과 거래를 주관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사모 시장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핵심 주체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자체 신용도를 기반으로 발행할 수 있는 단기채권인 발행어음은 예금시장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국내 증권사들이 운용하는 발행어음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41조5000억원에서 6개월 만에 44조4000억원으로 6개월간 3조원 늘었다. 발행어음은 증권사들이 1년 이내 만기로 발행하는 단기어음으로 2~3%대 금리를 준다.
증권사들의 몸집은 빠르게 커질 전망이다.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등 대형 증권사들이 IMA 인가를 얻기 위해 잇따라 유상증자를 추진하고 있다. 이 인가를 획득하면 발행어음을 자기자본의 300%까지 판매할 수 있다. 그동안 발행어음 사업을 하지 않았던 삼성, 신한투자, 메리츠, 하나, 키움증권 등도 이 분야 진출 채비를 꾸리고 있다.
정부도 모험자본에 대한 자본 공급을 늘리기 위해 증권사 대형화에 힘을 싣고 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증권사들이 퇴직연금, 프라이빗뱅킹(PB) 분야에서 은행, 보험 등 거대 금융사들과 맞붙은 데 이어 은행 안방인 2500조원 규모 예·적금 시장에서 고객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며 "앞으로 외화예금·환전과 간편결제, 디지털 자산관리, 토큰증권(STO) 등 여러 분야에서 경쟁이 달아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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