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다리 내놔..” 음산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입에 칼을 문 할머니가 천장에서 사람들을 내려보고 있는가 하면, 조선시대 남성들의 상투가 층층이 매달려 있다. 흡사 공포체험을 방불케 하는 이곳은 서울 종로구의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5’의 후원작가로 선정된 4인의 전시가 지난 29일 공개됐다. ‘올해의 작가상’은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2012년부터 공동으로 주최해 온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 후원 프로그램이자 수상 제도다. 매년 작가 4인(팀)을 선정하여 신작 제작과 전시를 지원하고, 작가들의 해외 프로젝트를 후원해왔다. 올해 선정된 작가들은 김영은, 임영주, 김지평, 언메이크랩으로 모두 여성이다.

임영주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4전시실은 으슬으슬 팔뚝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섬뜩한 분위기를 풍긴다. 작가는 이곳을 ‘빈 무덤’이라 부른다. 그는 한국 사회에 내재된 오랜 미신과 현대 과학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믿음’을 주제로 이야기를 다룬다. 책부터 영상, 웹사이트, 설치,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로 이를 전달한다.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 ‘고 故 The Late’는 총 12개의 영상 및 사운드가 1시간 길이에 맞춰 재생되는 다채널 설치 작품이다. 한국의 ‘가묘(假墓)’ 풍습에 착안해 상상 속 ‘빈 무덤’을 구현한 것이다. 전시장 중앙에 VR을 착용하고 파묻혀 있는 형상처럼 관객들 역시 누운 채로 유사 VR 환경을 경험하거나 천장 모니터 속 젊어졌다 늙어지기를 반복하는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화장실에서 칼을 입에 문 채로 거울을 보면 미래 배우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속설에서 착안한 작품 '칼을 입에 물고 거울을 보면 미래가 보입니다'이다. 관객들은 작가가 임의로 만들어 놓은 빈 무덤, 즉 땅속에서 하늘과 죽음, 미래라는 다른 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후원작가로 선정된 작가들은 모두 여성이라는 점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작품에서 한국인이라면 공감할만한 사건이나 경험, 문화 등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 동양화를 전공한 김지평 작가는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병풍을 오려 작품을 만든다. 김영은 작가는 통금 사이렌이나 남북 경계선의 라디오 주파수 등 한국 사회의 특징적인 음향을 들려주고, 최빛나, 송수연으로 결성된 언메이크랩은 2023년 발생한 강릉시의 대형 산불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인다. 임영주 작가 또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미신과 과학 기술 사이의 경계들을 주된 관심사로 삼는다.

김영은 작가는 근대화 시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특징적인 소리나 역사적인 상황을 대변할 수 있는 독특한 청취 경험을 선사한다. 예컨대 1982년 해제된 통금 사이렌을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을 인터뷰 자료나 뉴스 등의 음향을 통해 상기시키는 식이다. 이외에도 남북 경계를 넘나드는 라디오 전파를 바탕으로 간첩들의 경험을 텍스트를 통해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작가는 전시장 곳곳에 노이즈캔슬링 기능의 헤드폰을 비치해 관람객이 작품의 시점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외에도 미국으로 이민 간 아일랜드 이주 여성 노동자가 부르는 노래를 바탕으로 이 여성들의 삶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흐르는 작품도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영은 작가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부족한 이야기를 가상으로 재현하면서 기록되지 않은 서사에 상상력을 붙인 작업”이라고 소개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LA에 거주하는 고려인 공동체를 찾아가 그들이 언어를 배우는 모습을 인터뷰한 영상 등을 전시하며 이주와 번역의 상황 속에서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소리를 기억하고 감각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2018년경 서해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거북이의 뱃 속에는 삐라가 가득 차 있었다. 이 사건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은 김지평 작가는 강렬한 이 기억을 곧 ‘코즈믹 터틀’이라는 작품에 이식했다. “옛 신화에서 동양화의 기원이 되는 문자와 그림을 인류에게 전했다고 전해지는 거북이가 현대 문명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을 보고 우주와 인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는 생각에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김지평 작가는 설명했다.
김 작가는 전통의 소실과 함께 밀려나는 존재와 상상력에 관해 이야기한다. 버려진 병풍에서 산수화적 요소를 떼어 만든 ‘산수화첩’과 병풍의 명칭이 여성 한복의 명칭과 같다는 점에서 병풍에 새로운 여성 인격을 부여한 ‘디바-무당’ 등을 이번 전시에서 함께 만날 수 있다.

재난의 현장이나 신화의 영역에서 수집한 이미지와 데이터를 수집하는 언메이크랩은 데이터셋, 컴퓨터 비전, 생성 신경망 기술 등을 활용한 영상과 설치 작품 등을 선보인다. 시시포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돌에 케첩을 뿌린 후 핫도그로 인식하게 한 작품이나 기묘한 시뮬레이션 빌리지에서 자란 블루 토마토를 통해 선보이는 심오한 풍경 등 기발하고 엉뚱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4명의 후원작가 중 ‘올해의 작가상 2025’ 최종 수상자는 전시 기간 중 국내외 심사위원들과 작품에 관한 공개 대화 및 2차 심사를 거쳐 2026년 1월에 발표된다. 전시는 내년 2월 1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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