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친구들의 SNS를 보다가 팔레스타인 작가 후삼 마루프의 글을 우연히 읽었다. 서제인 번역가가 한국어로 번역해 자신의 SNS 계정에 공유한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작가의 문장이 밤새 나를 뒤척이게 했다. “왜냐고? 배가 고파서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글을 써냈고, 그것은 단지 아직 살아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문장들이 오래도록 마음을 짓이긴다.다가오는 927기후정의행진 6대 요구안에는 전쟁과 학살을 종식하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히로시마에 폭탄이 떨어지기 전 발명가들은 자신의 발명품에 암호를 붙였다고 한다. 큰 폭발일 경우 ‘뚱보’, 작은 폭발일 경우 ‘작은 아이’. 폭탄이 목표 지점에 성공적으로 떨어져 폭발하자 그들은 ‘작은 아이’와 ‘뚱보’의 탄생을 서로 축하했다고 한다. 축하라니…. 폭발로 고통 속에 스러져가는 생명들 앞에서 ‘탄생’이라니…. 파괴되는 지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뒤집히면서도 내가 하는 건 허약한 다짐뿐이라 슬프다. 숨 가진 것들을 생각하면, 그 슬픔은 더 커진다. 슬픔은 무기력을 준다. 그리고 무기력은 슬픔을 사유하게 한다. 결코 일어날 리 없다고 믿었던 일들이 일어난 뒤에 배운 게 있다면 아마도 슬픔을 사유하는 힘이 아닐까.
요즈음 뉴스는 폭염과 홍수로 가득 찼다. 동쪽은 폭염, 남쪽은 홍수. 강릉의 상수원인 오봉저수지가 바닥을 보였을 때, 대통령은 재난을 선포했다. 반면, 건너편 도시 속초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제는 지하댐을 건설해 가뭄이 와도 3개월 동안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어렴풋이 듣는 소식이지만 미래를 예측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지혜는 생각할수록 가슴 뭉클한 데가 있다. 그것은 또 얼마나 큰 슬픔을 지나온 뒤엣것일까. 슬픔이란 떨쳐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깊이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슬픔을 통해 학습하고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말이다.
비가 오려 할 때, 날이 무척 가물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나무고, 그 나무를 통해 짐승과 벌레들이 날씨를 읽는다고 한다. 우리도 기후위기를 온몸의 감각으로 읽는다. 기후위기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망설임 없이 지금 당장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바지 염색이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걸 알면서도 청바지를 사서 입고 텀블러를 챙겨오지 못한 날이면 어김없이 일회용 컵을 쓴다. 말로는 반성하지만,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한다. 도서관에 갈 때면 자전거를 이용하고 나무를 심거나 기부하면서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낸 쓰레기들을.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데 음식물쓰레기통 안에 비닐봉지째 버린 사람이 있다. 사람에게서 악취가 난다. 나를 바라보는 지구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겠지. 문득 섬뜩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가려운 것이 사람이라고 했던가. 사람이 가려워서 사람은 서로의 등을 긁어줄 줄 안다. 사람으로 괴롭고 사람으로 구원받을 준비를 하는 그날이 기대된다. 927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는 누구라도 한 사람 한 사람 고유한 이야기와 절실함을 가지고 올 것이다.
어떤 이는 농사짓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어떤 이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또 어떤 이는 기후 재난으로 터전을 잃은 이웃들을 위해 거리로 나설 것이다. 나는 별 하나에 시를 품고 행진에 참여하고자 한다. 또다시 슬픔에 잠기더라도 우리가 아직 살아 있기에 함께 희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9월 27일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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