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미국 생산 중심의 글로벌 미디어 산업 판도도 흔들리고 있다. 한국 서울, 인도 뭄바이 등에서 생산한 콘텐츠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가 '다극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영어권 시장의 성장, 관련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 각국 정부의 규제 강화 등이 요인이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은 해당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 곳곳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다.
넷플릭스 등 OTT의 성장 배경 중 하나는 비영어권 콘텐츠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글로벌 확장과 맞물려 비영어권 콘텐츠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넷플릭스가 올 2분기 주주 서한을 통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전체 시청 시간의 3분의 1 이상이 비영어권 콘텐츠에서 발생했다. 이는 비영어권 콘텐츠가 일부 마니아층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 전체의 성장을 견인한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이런 경향은 미디어 분석 기업 '패럿 애널리틱스'가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전 세계 콘텐츠 시장에서 비영어권 콘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23%에서 2023년 40%로 급증했다. 지난 5년간 글로벌 시청자의 콘텐츠 소비 패턴이 근본적으로 변하면서다.
일명 '자막 세대'의 부상도 요인이다. 젊은 세대의 미디어 소비 습관은 이런 변화를 가속했다. 이러닝 플랫 'Preply'의 최근 미국인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70%가 대부분의 콘텐츠를 시청할 때 자막을 사용한다고 응답했다. 이런 행동은 단순히 외국어 콘텐츠 시청을 위해서가 아니다. 멀티태스킹 환경에서의 집중력 유지, 최근 미국 영화 및 드라마의 불분명한 대사 전달 문제, 다양한 억양의 이해 등을 위한 것이다. 해당 세대는 엔터테인먼트를 ‘읽는’ 행위에 익숙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2020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을 때 시상식에서 했던 "1인치 장벽(자막)만 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발언을 Z세대들이 현실화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관련 AI 기술도 비영어 콘텐츠 인기를 견인했다. 최근 수십 개의 언어로 자막과 더빙을 제공하는 기능의 배경에는 AI 기술의 발전이 있다. AI 기반 기계 번역, 음성 합성 및 복제 기술은 현지화 작업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모든 영상 콘텐츠를 출시 첫날부터 전 세계에 동시 공개하면서도 광범위한 언어 지원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5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다.
알고리즘 추천 기능도 요인으로 꼽힌다. 소비자가 자막이나 더빙으로 특정 비영어권 콘텐츠를 시청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알고리즘은 해당 사용자에 더 많은 비영어권 콘텐츠를 노출한다. 이는 접근성 높은 콘텐츠의 공급이 수요를 다시 창출했다. 창출된 수요는 다시 더 많은 현지화 투자와 콘텐츠 노출을 정당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했다.

이런 성장의 핵심 동력은 인도 국민 스포츠인 크리켓 프리미어 리그(IPL)의 독점 중계권이다. 디즈니는 단기적으로 올 회계연도에 약 2억 달러의 지분법 손실을 예상한다. 하지만 이는 통합 비용에 따른 것이다. 7억 5000만 명 이상의 잠재 시청자를 가진 시장을 장악하는 장기적 전략 가치를 따지면 감당할 수준이라는 평가다.
한국은 인도와 다르다. 시장 자체보다는 글로벌 소프트파워 생산 기지로 부상했다. 넷플릭스는 작년부터 2027년까지 한국에 25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투자의 효과는 명확했다. 작년 하반기 한국 콘텐츠는 전체 넷플릭스에서 총 77억 시간 소비됐다. 전체 시청 시간의 약 8%를 차지했다. 이는 미국 콘텐츠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한국이 제작한 콘텐츠가 전 세계 시청자를 사로잡는 강력한 수출 상품임을 입증했다.
나이지리아는 영화 산업에서 ‘날리우드(Nollywood)’라 불리며 아프리카 대륙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스릴러 '블랙 북'이 전 세계 69개국에서 상위 10위에 진입했다. 넷플릭스는 2016년부터 2023년까지 나이지리아에 23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고 발표했다.
튀르키예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계적인 TV 드라마 수출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연간 드라마 수출액은 5억~6억 달러에 달한다. 약 200개국에서 즐긴다. ‘디지(Dizi)’로 불리는 튀르키예 드라마의 강점은 많은 회차 수와 비용 효율적인 제작 구조가 꼽힌다. 중남미, 중동, 동유럽 지역의 방송사 및 플랫폼에 매력적인 상품이다.

스페인 마드리드는 유럽의 전략적 허브로 꼽힌다. 넷플릭스가 올해부터 2028년까지 스페인에 10억 유로 이상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일명 ‘현지를 위한 현지 콘텐츠(Local for Local)’ 전략을 위해서다. 스페인의 드라마 제작 스튜디오는 EU의 콘텐츠 쿼터 규제를 충족시키는 제작 기지 역할도 한다. '종이의 집'의 성공이 입증했듯이 비 스페인어권 시청자에게도 스페인 콘텐츠는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규제를 도입했다. 스트리밍 플랫폼은 프랑스 내 매출의 20%를 프랑스 및 유럽 콘텐츠 제작에 의무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캐나다도 온라인 스트리밍법을 통해 자국 문화를 보호하고 있다. 연간 캐나다 내 매출이 2500만 캐나다 달러를 초과하는 해외 스트리밍 서비스 기업은 매출의 5%를 캐나다 콘텐츠 지원 기금에 기여해야 한다. 캐나다 라디오-텔레비전 및 통신위원회는 "해당 정책은 경쟁의 장을 평평하게 만들고 디지털 시대에 캐나다 스토리텔러들의 지속할 수 있는 미래를 보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IP(지식재산권) 소유권 문제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은 제작비를 전액 지원하는 대가로 해당 콘텐츠의 IP를 독점적으로 확보하는 계약 모델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오징어 게임' 같은 초대형 히트작이 나와도 막대한 부가 가치는 대부분 OTT 기업이 가져간다. 업계에선 "이러다 넷플릭스의 하청공장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해외 자본의 대규모 유입은 배우 출연료와 스태프 인건비 등 제작비를 끌어올렸다. 한국 드라마의 회당 평균 제작비는 10억~30억원 수준으로 급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금력이 부족한 국내 방송사나 중소 제작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국내 드라마 총제작 편수는 2022년 141편으로 정점을 찍은 후 2024년 107편으로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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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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