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산업용 전기요금이 미국, 중국 등 주요 경쟁국보다 50% 이상 높아지면서 국내 제조업계의 ‘탈한전’ 행렬이 빨라지고 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전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 도매시장 가격으로 전력을 직접 구매하거나 자체 발전 설비를 확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정부가 한국전력공사(한전)의 누적 적자를 이유로 산업용 전기요금을 잇달아 인상하면서 산업계의 불만과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산업용 전기요금의 급격한 인상은 제조업체들의 원가 부담을 크게 높여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미국(121.5원/kWh), 중국(129.4원/kWh), 일본(약 140원/kWh) 등 주요 경쟁국 대비 약 50% 이상 높은 190.4원/kWh 수준이다. 불과 3년 사이 70% 가까이 인상되면서 제조업계의 비용 부담은 급격히 커졌다.
미국과 일본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발전 효율을 기반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대규모 국영 발전소를 통해 가격을 통제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전기 다소비 업종인 철강, 석유화학, 비철금속, 디스플레이, 시멘트 등에서는 전기요금이 제조원가에서 10~20% 이상을 차지한다. 급격한 전기료 부담 증가는 원가 상승과 수익성 악화를 불러와 생산 축소와 투자 위축 우려를 낳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제조업체 3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9.4%가 자가 발전이나 전력 직접구매 등 새로운 전력 조달 방식을 도입할 의향을 보였다. 국민의힘 이종배 의원실이 전력거래소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10월 이후 SK어드밴스드, 삼성전기, 한화솔루션, LG화학 등 11개 대기업이 전력 직접구매를 신청해 한전 유통망을 우회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탈한전’은 단순한 비용 절감 차원을 넘어 산업계의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력시장 가격(SMP)은 한전 산업용 요금(약 185원/kWh)보다 40~60원 정도 저렴해 연간 수백억원에서 조 단위까지 절감 효과가 기대된다.
석유화학업계는 전력시장 직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발 공급과잉과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는 이들 기업은 한전 대신 SMP에서 직접 전기를 구매, 연간 수백억원을 아끼며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중이다.
철강업계도 전기요금 인상 여파가 심각하다. 전체 산업용 전력 소비자의 0.1%에 불과한 대기업들이지만 연간 전력비 부담은 4조원을 넘어선다. 포스코, 현대제철 등 전력 사용량 상위 10대 기업의 추가 비용만 1조원에 육박한다.
특히 전기로 방식으로 철강을 생산하는 기업은 제품 원가에서 전력 구입비가 10~20%를 차지한다. 전기로는 철스크랩을 녹이는 데 많은 전력을 쓰기 때문에 전기요금 인상은 수익성에 큰 타격을 준다.
포스코는 부생가스와 LNG 자가발전 설비로 전체 전력의 약 80%를 자체 생산해 비용 부담을 다소 줄이고 있다. 동국제강은 전기요금 할증이 붙는 6~8월 압연공장을 야간에만 가동하는 ‘야간 조업’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연간 전기료 부담은 여전히 3000억원에 육박한다.
동국제강이 2023년 도입한 10MW급 태양광 설비로 약 15억원을 절감했으나 전체 부담 경감에는 미미하다.
현대제철은 국내 전기료 부담이 크다는 점을 들어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대규모 제철소 투자를 결정했다. 루이지애나주의 산업용 전기 요금은 MWh당 52.8달러(약 7만7900원)로 국내 18만2000원 대비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풍부한 천연가스 공급 덕분이다.

고려아연은 비철금속 업계 전력 다소비 기업으로 아연과 연 제련에 필수적인 전해 공정에서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연간 전력비가 2000억원대(별도 제무재표 기준)에 이르며 제조원가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전기요금 인상은 곧바로 수익성 악화로 이어진다.
그러나 2021년 준공한 LNG 복합화력발전소 가동 이후 외부 전력 의존도를 줄여 전력비 부담 완화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온산제련소 전력비는 2020년 약 2634억원에서 2024년 1921억원으로 감소했고 전력비 비중은 5.4%에서 2.6%로 절반 이상 줄었다.
고려아연은 전체 전력의 약 75%를 자가 발전으로 조달하며 2023년과 2024년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에도 불구하고 전력비 비중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2025년 상반기에는 전력비가 다소 증가했으나 매출 증가와 함께 비중은 2.8%에 머물렀다. 이러한 에너지 효율화 노력은 영업이익률 방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려아연은 전기공급 및 판매업을 정관에 추가하며 장기적으로 전력 자립 100% 달성을 목표로 사업을 확장 중이다. 고정비 부담이 큰 비철금속 업계에서 에너지 효율과 전력 안정성 확보는 비용 절감을 넘어 경쟁력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부는 현재 35GW 수준인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2030년까지 78GW 이상으로 2배 이상 확대하는 목표를 세웠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설비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설비 투자와 송배전망 보강에 따른 막대한 비용 부담은 한전에 집중되고 있다. 한전은 약 40조원의 누적 적자를 기록 중이며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전력망 유지와 신재생에너지 확대라는 정책 과제가 산업계의 전기요금 부담 증가와 충돌하면서 정부는 두 목표 간 균형을 모색하고 있다.
한전은 전력망 유지와 신재생에너지 설비 확대에 56조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지만 재정난 속에서 설비 투자와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을 동시에 감당하기 어렵다. 최근 3년간 한전은 산업용 전기요금을 7차례 인상했지만 가정용은 5차례에 그쳤다.
대통령도 추가 인상 가능성을 내비치며 한전 재정 건전성을 강조했으나 산업계 부담과 국민 물가상승 압력은 심각한 상태다. 제조업계는 한전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 전력시장 가격으로 전기를 직접 구매하는 전력 직접구매를 확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전은 판매량 감소와 수익성 악화를 동시에 겪으며 재정 부담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업종별 차등 요금제 도입, 에너지 효율 지원 확대, 전력시장 구조 개편 등 다각적인 정책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한전 적자 해소와 산업계 부담 완화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한전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는 것은 필수지만 과도한 전기요금 인상은 제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투자 위축을 초래한다”며 “정부와 한전이 머리를 맞대 산업계 부담 완화와 재정 안정 사이 적절한 균형점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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