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베네치아 리도섬 ‘팔라초 델 시네마’(영화의 전당)에 모습을 드러낸 에마 스톤. 그의 머리카락은 짧았다. 올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담한 픽시컷을 선보였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영화 ‘부고니아’를 위해 감행한 삭발의 흔적이 역력했다. 스톤의 헤어스타일의 비밀은 ‘부고니아’ 상영이 끝나자마자 풀렸다. 삭발의 의미가 원작의 광기와 상징을 취하되, 낡거나 덜 세련된 요소는 과감히 잘라냈다는 결단과도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부고니아’는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작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고작 7만3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치며 쫄딱 망한 그 영화다. 이 ‘저주받은 걸작’을 할리우드가 집어 들었다. 그것도 ‘미드소마’의 아리 애스터가 제작을 맡고, 드라마 ‘석세션’으로 에미상을 받은 윌 트레이시가 각본을 매만지고, 젊은 거장 반열에 든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메가폰을 잡아 자신의 오랜 페르소나인 스톤, 제시 플레먼스를 캐스팅했다니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줄거리는 같지만 원작을 과잉 답습하지 않았다. 란티모스는 기존의 톤을 반복하지 않고 카메라 워크와 절제된 색채로 불안의 정서를 더욱 증폭시킨다. 예컨대 공간·의상 변화가 거의 없는 영화에서 미셸이 부귀와 품위, 신성함을 의미하는 자줏빛 코트를 내내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병구(신하균 분)가 이태리타월을 박박 문질러 피부를 벗기고, 이 상처에 물파스를 문지르는 등 원작의 키치한 감수성도 과감히 없앤 대신 별다른 감정 기복을 보이지 않는 테디의 캐릭터를 통해 섬뜩함을 더했다. 원작이 투박한 광기에 기댔다면, ‘부고니아’는 은유로 치환한 고요한 광기를 선보인다. 영화에 몇 차례 등장하는 평평한 지구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는 란티모스식 블랙 유머 코드인 동시에 영화를 관통하는 커다란 상징이다.
납치당하는 인물을 여성으로 설정한 건 박수칠 만한 사건이다. 병구와 만식이 맞서는 원작의 남성 중심적 대결 구도를 깨뜨려서다. 미셸의 여성 정체성은 전통적인 강자(남성·권력자)와 약자(여성·피지배자)의 고정관념을 살짝 비튼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층과 피지배층, 외계인과 인간이라는 원작의 이분적 구도도 조금씩 모호해진다. 란티모스 감독은 바뀐 설정에 대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영화는 집착과 맹신,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진실을 억누르는 세상을 고발하는 커다란 우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지구를 지켜라!’와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주제의식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를 받아들이기에 원작이 다소 서툴렀고 너무 일찍 나온 반면 ‘부고니아’는 보다 시의적절하고 설득력 있는 연출을 갖췄다는 점이다. 란티모스 감독은 “(영화는) 인간 본성이 실제로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경보를 울리는 이야기”라고 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부고니아’는 국내에서도 관객과 만난다. 오는 17일 개막하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에 초청됐고, 이후 11월 국내 개봉한다. 라틴어 부고니아가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를 알아보거나 원작을 복습해 본다면 보다 선명하게 감상할 수 있다.
베네치아=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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