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식사 자리에서 ‘쉬었음 청년’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일자리도 없고 구직활동도 안 하는 청년을 대상으로 정부가 교육과 구직 지원 예산을 늘리고 있으니 그걸로 뭔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얘기에서 시작됐다. 지난 7월 ‘쉬었다’고 한 20대는 42만1000명으로 7월 기준 역대 최대였다.프로젝트 얘기는 나오다가 말았다. 누군가 “친구 동생이 쉬었음 청년”이라고 하자 “내 조카도 그렇다” “친구 아들이 그렇다”는 얘기가 줄을 이었다. 이런 대화는 “요즘 애들이 배가 불러서 그런다”는 방향으로 흐르곤 한다. 그날도 그랬다.
어떤 문제의 원인을 당사자나 해당 집단의 특성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쉬운 비난 방식이다. 그게 원인이라면 논의가 복잡할 것도 없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별로 없다. 요즘 청년들이 정말 나약한 건지, 어느 세대의 삶이 더 고단한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방법도 없다. 이 때문에 청년층이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배경을 그 세대의 특성에서 찾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우선 청년들이 원하는 좋은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다. 고용노동부가 직장을 다니지 않는 19~34세 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들이 원한 최저 급여는 월 235만원이었다. 과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 정도 일자리도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통계청의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 조사’를 보면 취업 경험이 있는 청년(15~29세)의 53.5%가 첫 직장에서 200만원 미만 월급을 받았다.
투자 환경 악화로 인한 기업 엑소더스가 이런 현상을 부채질한다.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은 지난 6월 미국 25개 주 상·하원 의원 69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이후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1600억달러를 투자해 일자리 83만 개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뒤집어 말하면 국내에 생겼을 수도 있는 일자리 83만 개가 미국으로 빠져나갔다는 얘기다. 미국으로 향하는 일자리는 사업 전망과 근로 조건이 좋은 것들이어서 더욱 아쉽다.
이에 더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청년들을 좌절하게 한다. 대기업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중소기업 임금 수준은 57.7에 불과하다. 일본(73.7), 유럽연합(65.1)에 비해 유난히 낮고 격차 또한 갈수록 벌어진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눈이 높아 중소기업에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정작 청년들은 대기업·전문직 일자리를 갖지 못하면 기성세대로부터 실패한 인생이라는 식의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한다.
더구나 우리 노동시장에는 청년들의 근로 의욕을 저해하는 요소가 적지 않다. 월급 200만원 일자리 구하기도 녹록지 않은데, 실업급여 하한액이 월 192만원이다. ‘그 돈 받고 일하느니 노는 게 낫다’고 하는 일부 청년의 근로 윤리만 탓할 일이 아니다. 너무 올라 버린 최저임금은 고용주의 의지를 꺾는다. 최저 시급 1만320원에 4대 보험, 주휴수당, 퇴직금 등을 더하면 고용주가 부담하는 최저 인건비는 대략 시간당 1만5000원, 월 260만원이다. 그러니 동네 커피점에서도 경력자만 찾고 취업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은 ‘알바도 경력만 뽑는다’며 주저앉는다.
인공지능(AI) 확산은 또 하나의 거대한 파도다. 사회초년생의 노동시장 진입이 한층 힘들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런 조짐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 와중에 일률적인 정년 연장 등 청년 고용을 더 어렵게 할 정책이 줄을 잇는다. 현재 일자리를 가진 근로자들의 ‘내부 노동시장’을 보호하느라 미취업 청년을 포함한 ‘외부 노동시장’은 도외시한 정책들이다.
구한말 조선에 다녀간 외국인들이 쓴 책을 보면 ‘게으른 조선인’을 묘사한 내용이 눈에 띈다. 그러면서 변변한 산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무했던 열악한 경제 구조와 재산권 보호가 미흡한 가운데 자행되는 관리들의 수탈을 그 배경으로 지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120여 년 전 망국 직전의 나라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무리지만, 청년이 일할 만한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여건과 근로 의욕을 북돋지 못하는 제도적 환경은 닮은 구석이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누군가 “한국에서 일하는 청년을 보기 힘들다. 그들은 게으르다”는 기록을 역사에 남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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