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가보는 길을 달릴 때가 가장 설렙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쉽게 가지 않는 길처럼 남들이 만들지 않는 술을 만들어가는 게 요즘 제 인생의 중독입니다."

지난달 13일 대전 계족산 황톳길에서 만난 조웅래 선양소주 회장(66)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소주를 팔아 얻은 수익으로 14.5㎞ 길이의 계족산 황톳길을 2006년부터 20년 가까이 지켜왔다. 지역 주민들과 '건강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는 일념에서다.
선양소주가 해당 시설을 유지·보수하고 숲속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데 매년 약 10억원이 투입된다. 지역 주민들은 “이제는 전국적인 힐링 명소로 자리 잡았다”고 입을 모은다. 조 회장은 “우리 술을 마셔준 소비자에게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황톳길을 유지해 왔다”며 흙 묻은 발을 툭툭 털었다.
선양소주는 충청권에 뿌리를 둔 지역 주류 기업이다. 현재 177명의 임직원이 근무하며 대전·세종·충남을 중심으로 한 유통망을 갖추고 있다. 1973년 설립 이후 ‘이제우린’(선양 린) 등 향토 소주 브랜드를 선보이며 지역의 대표적인 주류 회사로 자리 잡았다.

소주 광고판에는 스타 여배우가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선양소주는 달랐다. 광고 모델로 등장한 이는 화려한 여배우가 아닌, 푸른 중절모와 청바지를 입고 노란 뿔테안경을 쓴 60대 남성이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조웅래 회장 자신이다.
주류 업계에서는 “무모하다”, “망하려고 작정했냐”는 싸늘한 반응이 쏟아졌다. 관련 업계에서는 유례가 없는 독특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오히려 신선하다며 호응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SNS에는 “참이슬 광고모델인 아이유와 맞짱 뜨는 소주 회장님”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조 회장은 “수억 원을 들여 여배우를 기용한 적도 있지만, 그 비용을 차라리 소주 맛과 황톳길에 투자하고 싶었다”며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도 대안이 없으니 내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음주 문화가 달라지면서 주류 시장 전반이 침체했지만, 선양의 행보는 달랐다.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다양한 신제품을 꾸준히 내놨다.
결국 야심차게 내놓은 신제품이 출시 사흘 만에 전국 편의점에서 50만 병을 팔아치우고 누적 판매량 400만 병을 돌파했다. 그 덕에 선양소주 매출은 지난달 353억 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321억 원)보다 32억 원(약 10%) 증가했다.
조 회장은 “예전엔 술을 취하려고 많이 마시는 분위기였다면 앞으로는 점점 맛과 분위기를 즐기는 시대가 될 것”이라며 “새로운 음주 문화를 만드는 게 앞으로의 숙제”라고 말했다.

잘나가던 IT벤처 1세대, 술판에 뛰어들다
조웅래 회장은 원래 정보통신(IT) 벤처 창업가였다.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1990년대 초반 2000만 원을 빌려 ‘7 00-5425’ 전화 자동연결 서비스를 창업했다. 당시 나이 33세였다.
전화를 걸면 운세와 음악이 흘러나오는 신개념 서비스로 히트를 쳤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던 국민 대부분이 알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그런데도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사업이 잘돼서 수백억을 벌었지만 남들이 다 가는 길만 가는 것 같아 마음속에 공허함이 있었다”며 “늘 다른 길을 개척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2004년 충청권 향토 소주회사 선양주조가 매물로 나오자 그는 과감히 인수했다. 주변에서는 “왜 잘나가는 IT 벤처 기업을 버리고 지방에 있는 소주 공장으로 가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무모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가족들도 걱정이 컸지만 조 회장은 “죽더라도 새로운 길에서 죽겠다”는 각오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땐 술도 하나의 콘텐츠라고 생각했다"며 "전화기가 사람을 연결했다면 술은 더 직접적으로 사람을 이어주지 않느냐”고 말했다.

"서울 성수동에 가서 청년들을 놀라게 해보자"
젊은 소비자 마음을 흔든 건 과감한 마케팅이었다. 2023년 서울 성수동에 연 팝업스토어 ‘Plop(플롭) 선양’이 대표적이다. 운하 모양의 공간에 실제 배를 띄워, 방문객이 소주 병뚜껑 모양 보트를 타고 고래를 만나러 가는 체험형 이벤트였다.
광고를 통해 매출을 올리겠다는 생각보다는 “지역 소주회사가 성수동에 올라가서 젊은 세대를 한 번 놀라게 해보자”는 단순한 발상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3주 동안 1만7800명이 다녀갔고, SNS에는 인증 열풍이 이어졌다. 조 회장은 “참이슬, 진로, 처음처럼만 찾던 소비자들도 한 번 찌르고 흔드니 반응이 오더라”며 “지역 소주도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그 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했다.

맨발 마라토너 CEO … 새벽마다 달리며 아이디어 구상
조 회장은 자타공인 ‘마라톤광’이다. 25년째 달리기를 이어오며 풀코스 완주만 84회, 2021년에는 5228㎞ 거리의 대한민국 국토 경계 한 바퀴를 혼자 완주했다. 그는 새벽마다 달리며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번 신제품 구상도 러닝 중에 나왔다고 한다.
조 회장은 “주변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지만, 제대로 미쳐야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사업 아이디어 대부분이 달리기 중에 나오다 보니, 내가 마라톤 대회에 다녀오면 직원들이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일지 긴장한다”고 웃었다.

회사에도 달리기 문화가 자리 잡았다. 신입사원 수습이 끝나면 직원들이 함께 10㎞를 완주해야 한다. 60대인 조 회장 역시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걷더라도 포기만 하지 않으면 통과할 수 있어 지금까지 낙오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함께 달리며 공동 목표를 이루면 자연스럽게 팀워크가 생긴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몸으로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조 회장이 회사를 처음 인수했을 당시 직원들 사이에는 패배 의식이 짙게 깔려 있었다. 조 회장은 달리기를 통해 이를 극복했다고 한다. 함께 달리며 끈기와 도전 정신을 몸으로 체득하게 한 것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경험이 회사 문화까지 바꿔놨다”고 말했다.


사업 과정에서 배신당한 경험도 있었다. 조 회장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받았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며 “근데 뭐 어쩌겠나, 술 한잔을 하고 달리며 풀었다”고 회상했다. 코로나19 시기에는 모두가 "곧 망한다"고 비아냥거릴 때 전국을 뛰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이를 ‘마음의 면역력’이라 표현했다.
실패도 많았다. 2013년 음료에 섞어 마시는 믹싱주 ‘맥키스’를 내놨지만 반짝 흥행에 성공했을 뿐이었다. 타사에서 곧장 과일소주 등 혼합주류를 출시하며 3년 만에 단종됐다. 그러나 조 회장은 “10년이 지난 지금 칵테일 문화가 일상화됐다”며 “앞서간 도전이었을 뿐 그때의 실패 경험은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직원 채용 기준도 남다르다. 외모와 학벌보다는 끈기와 성실함을 본다. 조 회장은 “앞으로 머리 쓰는 일은 인공지능(AI)이 대부분 도와줄 것 같다"며 "결국 변화를 빠르게 대처하면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고 말했다.
그는 신입사원 교육에서도 “오감을 키워라, 정해진 길만 가지 마라”는 말을 자주 한다. 틀에 박힌 인재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도전정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직업에 대한 불만족을 느낀 적은 없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조 회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주류 업계가 규제도 많고 대기업의 자본력에 밀려 힘든 순간도 많지만, 작은 회사라 오히려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 30대로 돌아간다면 다시 이 길을 선택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는 “소주가 아니라 또 다른 길을 갔을 것"이라며 "무모하지만, 또 엉뚱한 길로 가려고 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직업불만족(族) 편집자주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했지만 매일 퇴사를 고민하는 30대 청년, 안정적인 직장을 관두고 제2의 삶을 개척한 40대 가장,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70대 청소 노동자까지. '직업불만족(族)'은 직업의 겉모습보다 그 안에 담긴 목소리를 기록합니다. 당신의 평범한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깊은 위로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일하며 살아가는 세상 속 모든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하단 구독 버튼을 눌러주시면 직접 보고 들은 현직자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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