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은 자리에서 최고 대우를 받았다. 21년간 LG그룹 임원이었고 계열사 사장 자리에 올라 샐러리맨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퇴직과 동시에 억대 연봉, 차량과 기사, 비서, 전용 사무실 같은 대접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대기업 임원 퇴직을 ‘죽음과 같은 경험’이라고 하는 이유다. 하지만 계속 남으려고 발버둥치거나 사외이사, 중견기업 대표 같은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동안 돌보지 않던 나를 가꾸는 데 시간을 썼다.
이병남 전 LG 인화원 사장(71)은 최근 은퇴 후 10여 년간의 경험과 통찰을 담은 책 <오늘도 성장하고 있습니다>를 펴냈다. 그는 지난 10일 “쫓기듯 밀려나지 않고 스스로 퇴직 시점을 정한 자발적 은퇴였음에도 막상 출근하지 않자 적막감과 공허함을 이기기 쉽지 않았다”며 “극복 경험을 은퇴자들, 은퇴를 앞둔 후배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에는 그가 겪은 시행착오와 극복 과정, 후배 세대와 소통할 때 지켜야 할 점 등을 담았다. 중견기업 대표 등의 제안을 마다한 그때의 선택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 전 사장은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인사관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조지아주립대 경영학 조교수를 지냈다. 미국에서 15년간 학자의 길을 걷던 그가 1995년 귀국해 LG에 몸담은 것은 노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문제를 푸는 핵심은 기업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사관리(HR) 분야에서 족적을 남겼다. LG가 국내 최초로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고 최고인사책임자(CHO) 직을 신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노동조합을 경영 파트너로 대우하면서도 파업으로 근로하지 않은 기간의 임금을 나중에 보전해주던 관례를 없애고 철저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세웠다.
이 전 사장은 “가족이 해외에 있어 혼자 사는 만큼 외로움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고립감을 극복한 비결은 크게 세 가지다. 글을 쓰며 몰입하는 시간을 갖는 것, 주 2회 이상 헬스클럽에 가서 근력 키우기, 비영리재단 이사 활동을 통한 사회적 교류 이어가기 등이었다. 그는 경영 현장에서 겪은 통찰을 담은 <경영은 사람이다>와 <회사에서 안녕하십니까> 등 두 권의 책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대기업 사장 출신으로 여유가 있으니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그는 이에 대해 “은퇴자가 갖는 삶의 자세는 생각보다 돈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돈이 있어도 나눔과 교류에 인색한 노인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친정인 LG의 후배들이나 여러 단체 요청으로 종종 강연을 나간다. 이 전 사장은 “은퇴자가 좋은 멘토나 강연자가 되려면 가르치려 들어선 안 된다. 잘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답을 주려고 하지 말고 잘 듣다가 핵심을 짚는 질문으로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도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려움 탓에 말년까지 자리와 예우에 집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이해관계 없이 사람들과 교류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은퇴와 노화는 새로운 자기 돌봄과 성장의 기회가 됩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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