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이 11일 실시한 설문조사에 응한 62개 중소·중견기업 최고경영자(CEO)는 공통적으로 ‘탈한국’ 고민을 털어놨다. 미국발 관세 전쟁에 중국의 저가 공세로 생사기로에 선 와중에 정부의 잇단 반기업 입법으로 ‘3중고’에 시달리고 있어서다.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으로 중소기업 노조는 대놓고 경영진을 무시하는 가운데 대기업 중심으로 시행될 주 4.5일제는 중소기업 인력 공급을 더 꼬이게 만들 것으로 CEO들은 우려했다.

중소기업 CEO들이 가장 부정적으로 꼽은 이재명 정부 정책은 노란봉투법(43.5%)이었다. 이어 주 4.5일제(30.6%), 중대재해처벌 강화(14.5%) 순이었다. 노란봉투법이 기업 경영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란 응답은 82.3%에 달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업장 이전 등 경영 사항으로 쟁의 범위가 확대되는 점(54.9%)이었다. 원청 책임 범위의 과도한 확대(33.9%)도 문제로 지적됐다.
중소기업인들은 내년 3월 시행 예정인 노란봉투법으로 피 말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국내 정보기술(IT)기업의 하청사 대표인 A씨는 최근 노조가 원청사에 직접 교섭을 요구하는 집회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A씨는 “노사분규 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하청사를 어느 원청사가 좋아하겠냐”며 “하청사 CEO는 원청사와 하청 노조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고 하소연했다.
대형 조선소 1차 협력사인 B사는 최근 사내 하청 구조를 면밀히 분석했다. 생산직 300여 명 중 절반이 재하청과 재재하청으로 파견된 직원이어서 언제 어디서 문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어서다.
이준희 광운대 법학부 교수는 “제조업종 원청사를 하청업체 근로자의 사용자로 간주하면 한국 노동시장 구조가 원청 대기업만으로 단순화돼 하청사인 중소기업은 사라지고 대기업만 생존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연구개발(R&D) 인력이 많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애로사항이 많았다. 한 반도체 장비 업체는 1년 내내 인력을 채용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인기 속에 R&D 수요가 늘어 이 회사는 매년 20명 이상 대졸 인력을 뽑는데 해마다 10명 이상이 빠져나가고 있어서다. 이 회사 대표는 “주 4.5일제는 대기업 귀족 노조에나 통용되고 중소기업 직원에겐 딴 나라 얘기”라며 “일은 대기업보다 더 많이 하는데 연봉이 적다면 누가 중소기업에 남겠냐”고 반문했다.
중소기업 CEO들의 해결책은 ‘탈고용’과 ‘탈한국’이다. CEO들은 정부의 반기업 정책에 대응할 전략으로 자동화·디지털전환 투자(51.6%)를 1순위로 꼽았다. 다음으로 해외 이전(24.2%)을 택한 비율이 많았다. 이재명 정부 들어 해외 이전·확대를 추진하거나 검토 중인 기업이 각각 25.8%로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다.
한 전자부품업체는 국내 모든 생산 라인을 스마트팩토리로 바꿔 무인 공장 수준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단순 조립 기능에 그치던 베트남, 인도 생산 법인에 완제품 제조시설과 연구소를 이전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사 대표는 “의대에 미친 한국보다 베트남, 인도의 공학 인재 수준이 높은데 인건비는 반값”이라며 “사람은 덜 쓰고 해외로 나가는 것이 기업 생존을 위한 답이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노란봉투법과 더 센 상법 등을 입법했으면 최소한의 경영권 방어장치도 함께 마련해줘야 한다”며 “생산성 제고가 전제되지 않은 가운데 성급하게 주 4.5일제를 도입하면 제조업 기반이 와해될 것”으로 전망했다.
황정환/곽용희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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