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기업의 뿌리는 곧 창업주들의 오너십이다. 자본도, 제도도 없던 전후(戰後)의 척박한 환경에서 이들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며 산업화를 이끌었다. 사업보국과 인재제일, 현장주의와 인화단결 같은 철학은 한국 자본주의의 토대를 세웠다. 그러나 절대 권한과 밀실 의사결정, 가족 중심 경영이라는 그림자도 동시에 남겼다.
1세대 개척형 오너십
도전·뚝심·인화·사명감의 DNA
그중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한국형 오너십의 원형을 보여준다. 청년 시절 방황을 접고, 자식들의 얼굴을 보며 창업을 결심한 순간부터 그는 ‘사업보국’의 길을 걸었다. 정미소와 무역업에서 출발해 삼성상회를 세운 뒤 제조, 금융, 상사로 영역을 넓혔다. 1969년 삼성전자, 1974년 삼성중공업을 세운 그는 1983년 73세의 나이에 반도체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 ‘인텔조차 비웃은 과대망상’이라는 조롱이 뒤따랐으나, 불과 10개월 만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삼성은 세계 메모리 시장 1위로 자리 잡는다. “결심 전엔 신중하되, 결정 후엔 과단성 있게 실행하라”는 그의 철학은 오늘날까지 삼성 경영의 뼈대가 되고 있다.
정주영 현대 창업자 또한 ‘불굴의 개척자’였다.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소 판 돈 70원을 들고 집을 나선 청년은 막노동과 쌀가게 점원을 거쳐 자동차, 건설, 조선, 중공업을 일궈냈다.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 울산조선소는 모두 그의 결단의 산물이었다. 그는 늘 현장에서 답을 찾았다.

“이봐, 해봤어?”라는 말은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그의 기질을 상징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국가 성장의 동맥을 뚫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로 한국의 위상을 높였으며, 1998년에는 소떼 방북으로 민간 교류의 새 장을 열었다. 기 소르망은 이를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 평가했다. 정주영은 여전히 ‘세기의 도전자’로 기억된다.
구인회 LG 창업자는 ‘인화단결’로 기업 문화를 세웠다. 작은 포목상에서 출발해 락희화학과 금성사를 세우며 화학·가전·전자 산업의 기반을 닦았다. 합성세제 ‘하이타이’ 개발 당시 임원들이 회의적일 때 그는 “한번 믿으면 맡겨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결국 하이타이는 국민세제가 됐고, 이는 ‘사람을 믿는 오너십’의 상징으로 남았다. 또한 그는 ‘공장보다 연구소를 먼저 세워라’는 철학을 내세워 연구개발(R&D)을 중시했다. R&D와 인화단결이라는 두 축은 LG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혁신 기업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SK 창업자 최종건도 48세의 짧은 생애에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전쟁 직후 버려진 직기를 재조립해 선경직물을 세우며 출발한 그는 ‘겨레의 장래를 짊어졌다’는 사명감으로 사업을 키웠다. 1962년 대한민국 최초로 직물을 수출했고, 화섬과 석유화학으로 확장하며 ‘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포부를 그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타계 후 동생 최종현이 경영을 이어받아 ‘SKMS(SK Management System)’라는 경영 철학을 정립했고, 유공 인수와 정보통신기술(ICT) 진출을 이끌었다. 최종건의 개척정신은 비록 짧았지만 한국 경제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병철의 결단과 장기적 안목, 정주영의 불도저식 도전, 구인회의 인화와 연구개발 철학, 최종건의 사명감은 모두 한국 산업화를 추동한 동력이었다. 이들의 오너십은 산업보국이라는 사명감 속에서 ‘속도의 경제’를 가능케 했고, 무에서 유를 만든 기적을 이끌었다.
또한 이들의 개척형 오너십은 한국 자본주의의 원형이자, 이후 세대가 제도적 거버넌스로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긴 유산이다. 도전과 뚝심, 인화와 사명감이라는 DNA는 여전히 한국 기업 문화 깊숙이 자리하며, 오늘날의 투명성과 책임경영 요구와 맞물려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되고 있다.
2세대 확장·대기업형 오너십
글로벌 도약과 과잉의 덫
1980~1990년대는 한국 대기업 오너십의 두 번째 막이었다. 1세대 창업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개척자였다면, 2세대는 그 토대 위에서 그룹을 확장하고 대기업 체제를 공고히 한 세대였다. 이들은 창업자의 유산과 경제 고도화, 금융 자유화, 세계화라는 환경을 결합해 전방위 다각화와 글로벌 진출에 나섰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양날의 검이었다. 초고속 성장과 세계 시장 진출이라는 빛이 있었지만, 동시에 차입 경영, 문어발식 확장, 정경유착이라는 그늘이 짙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 구조적 취약성을 단숨에 드러냈고, 2세대 오너십은 가장 극적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2세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김우중 대우 회장이다. 1967년 작은 섬유 수출 업체로 출발한 대우는 김우중의 리더십 아래 30년 만에 세계 130여 개국에 진출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구호는 그의 철학이었고, 대우는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금융까지 전방위로 확장했다. 신흥국, 사회주의권, 아프리카·남미의 틈새시장까지 뚫은 그의 글로벌 지향성은 한국 대기업 오너십의 시야를 세계로 넓혔다.
그러나 그 성장 기반은 과도한 차입과 불투명한 내부거래였다.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대우는 해체됐고, 김우중은 해외 도피와 법정 공방 끝에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그는 한국 대기업 2세대의 빛과 그림자를 집약한 인물이었다.

1987년 부친 이병철 창업자 타계 후 그룹을 이은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신경영 선언’에서 그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선언했다. 이건희는 단순한 확장을 넘어 질적 도약을 지향했다. 품질 혁신, 디자인 경영, 브랜드 제고를 통해 삼성 제품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췄다. 반도체, 휴대전화, TV는 세계 시장을 선도했고, 삼성은 ‘초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삼성의 조직 문화를 바꾸는 데 집착했다. 권위적 보고 체계 대신 현장 의견을 반영하고, 국제 기준에 맞춘 품질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위상을 바꾼 혁신이었다. 이건희는 한국 대기업 오너십을 양적 성장에서 질적 경쟁력으로 전환시켰다.
정주영 창업자의 뒤를 이은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를 이끌며 현장 중심의 품질 경영으로 유명했다. 공장에서 직접 차량 밑으로 들어가 결함을 확인하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1997년 외환위기 위기 속 기아차 인수는 당시 무리라는 시각이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현대·기아차를 글로벌 5위권 완성차 그룹으로 키웠다.

그의 리더십은 부친의 불도저식 확장과 달리 품질과 내구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는 한국 자동차 산업이 세계무대에 안착하는 발판이 됐다. LG의 구본무 회장은 다른 대기업 총수들과 달리 ‘인화(人和)’와 합리주의적 경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95년 그룹 회장에 취임해 전자, 화학, 통신을 주축으로 성장 동력을 다졌고, 외환위기 속에서도 보수적 재무 전략과 책임경영 원칙을 지켜냈다. LG의 경영 스타일은 대우식 무모한 확장과 달리 ‘선택과 집중’에 가까웠다.
그룹 간판 사업을 글로벌 경쟁에 맞춰 효율적으로 재편했고, 조직 문화도 ‘사람 중심’ 기조를 유지했다. ‘고객 가치 경영’과 ‘투명 경영’은 훗날 LG가 안정성과 신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기초가 됐다.

이처럼 1980~1990년대 2세대 오너십은 확장, 다각화, 글로벌화로 요약된다. 김우중은 세계무대에서 무모할 만큼의 확장을, 이건희는 질적 혁신과 문화 변화를, 정몽구는 품질 집착과 위기 극복을, 구본무는 인화와 합리적 확장을 보여줬다. 그러나 공통된 한계도 분명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를 극적으로 드러냈으며 대기업 구조조정의 시대를 열었다. 확장의 시대는 끝났고, 2000년대 이후의 3세대는 위기관리와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과제와 마주했다. 확장·대기업형 오너십은 한국 자본주의의 또 다른 DNA였다. 그것은 ‘세계는 넓다’는 야망이자, 동시에 ‘과잉 확장’이라는 교훈이었다.
3세대 위기 관리·투명성 오너십
위기 관리에서 혁신·사회적 가치로
2000년대 이후 한국 대기업 오너십은 전환기를 맞았다. 1세대 창업자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2세대가 이를 토대로 그룹 확장과 세계화의 시대를 열었다면, 3세대는 전혀 다른 과제 앞에 서게 됐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한국 대기업은 차입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제 시장과 사회가 요구한 것은 단순한 성장이 아니라 위기 관리, 투명한 지배구조, 혁신이었다.

한국형 오너십의 DNA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그 중심에 선 기업이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삼성이다. 삼성의 3세대 리더십은 곧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이다. 그는 반도체 슈퍼사이클 붕괴, 미·중 기술 패권 경쟁, 글로벌 경기 침체라는 삼중고 속에서 삼성의 방향을 이끌었다. 그는 ‘위기일수록 더 큰 투자’라는 삼성의 전통을 이어가며 반도체, 파운드리, 바이오에 대한 수십조 원 규모의 선제 투자를 단행했다. 세계 최첨단 기술 패권 경쟁의 한가운데서 과감한 결단으로 미래의 먹거리를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이재용의 오너십은 단순한 투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하고, 사외이사 강화, 지배구조 개선을 약속했다. 성과와 혁신, 동시에 투명성과 책임 등 이재용이 짊어진 과제는 3세대 오너십 전체의 상징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자사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과거 현대차는 내연기관 중심의 ‘가격 대비 성능’으로 성장했지만, 그는 이를 전기차·수소차, 자율주행, 도심항공모빌리티(UAM)로 대전환시켰다. 현대차 아이오닉 시리즈는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으며, 수소차 분야에서는 세계 선두주자로 꼽힌다.

정의선은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미래 모빌리티 플랫폼으로 재정의했다. 이 과정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친환경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그룹 차원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았다. 정몽구 회장이 외환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품질 중심 경영을 강화했다면, 정의선은 그 토대 위에 산업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하는 혁신형 리더십을 세웠다.
최태원 회장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오너형 최고경영자(CEO) 중 하나다. SK하이닉스 인수는 그룹의 미래를 결정지은 승부수였고, 에너지, 통신, 바이오, 배터리로 이어진 포트폴리오 재편은 SK를 한국의 대표적인 ‘신성장 그룹’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을 단지 사업적 성취로 한정 짓기는 어렵다. 그는 한국 재벌 총수 중 드물게 사회적 가치(social value)와 ESG를 경영 전면에 내세웠다. “기업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재계 전체의 담론을 바꿔놓았다. 또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정부·사회·재계를 잇는 정책, 거버넌스 리더십을 발휘하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혁신과 성장, 동시에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중 과제를 떠안은 대표적 신흥 리더다. 그가 세운 쿠팡은 한국 유통·물류 시장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로켓배송’이라는 초고속 물류 시스템은 소비자들의 생활 방식을 바꾸었고, 온라인 커머스를 새로운 일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김범석의 진정한 의미는 쿠팡의 뉴욕증시 상장(2021년)에서 드러난다. 한국 스타트업이 국내를 넘어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직접 평가받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는 대기업 중심의 성장 서사와 다른, 신흥 창업자형 오너십의 부상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다만 쿠팡 역시 물류센터 노동환경 문제와 플랫폼 독점 논란에 직면하는 등 새로운 시대의 오너십 또한 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1세대가 산업화를 개척했고, 2세대가 세계화를 밀어붙였다면, 3세대는 위기 속 결단과 투명성, 그리고 사회적 책임과 혁신을 요구받는다. 이재용, 정의선, 최태원, 김범석의 궤적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지속 가능한 한국형 오너십’이라는 시대정신을 공유한다. 이제 한국형 오너십은 단순한 가문을 넘어, 사회와 시장의 요구에 응답하는 리더십으로 진화하고 있다.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