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칸디나비아반도는 디자인의 성지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우면서 ‘누구나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국가들이 모여 있다.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은 1930년대부터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디자인의 클래식이 된 조명, 가구, 소품들이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다.
따뜻함과 아늑함을 추구하는 문화, ‘휘게’의 나라 덴마크에는 미니멀하고 겸손한 디자인들이 도시마다 위트 넘치게 숨어 있다. 특히 수도 코펜하겐에는 디자인 갤러리와 쇼룸이 밀집돼 있다. 1890년 덴마크산업연합과 뉘칼스버그박물관 기금의 주도로 설립된 덴마크 디자인 박물관은 디자인 투어의 중심이다. ‘디자인 속의 품질’이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세워진 이 박물관은 산업 디자인의 수준과 철학을 완전히 바꿔놓은 곳으로 불린다. 이후 도심 속 옛 왕립프레데릭스병원 건물에 자리를 잡아 1920년대 카레 클린트의 박물관 겸 작업실로 쓰였고, 2022년 재개관했다. 이곳에선 다채로운 전시가 1년 내내 열린다. 6월마다 열리는 디자인 페스티벌에서도 이 박물관이 구심점 역할을 한다.
코펜하겐을 걷다 보면 250년 된 왕실 도자기 브랜드 ‘로얄코펜하겐’ 플래그십 스토어는 물론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페달 휴지통으로 잘 알려진 85주년의 빕(Vipp)처럼 익숙한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전설적인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핀 율의 유산을 잇는 ‘하우스 오브 핀 율’ 등 크고 작은 디자이너 아틀리에가 골목마다 가득하다. 전통의 브랜드뿐만 아니라 신진 디자이너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기다린다. 여기에 덴마크 미식의 상징인 노마 레스토랑은 20년간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디자인 브랜드들과 협업해 매년 새로운 팝업을 선보이며 발길을 붙잡는다.
바라보는 미학을 넘어 사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북유럽의 조명, 가구 등의 이야기는 스웨덴 명품 침대 브랜드 해스텐스로 이어진다. 5대째 이어오고 있는 명품 가구의 비밀을 최고경영자(CEO)에게 들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이색 콘셉트 스토어·스튜디오

도시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데 걷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코펜하겐에선 시민들처럼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 된다. 낯선 여행객의 시선에서 벗어나 디자인이 곳곳에 스며든 현지인의 삶을 탐험하기 위해, 코펜하겐 도보 여행을 떠났다.
루이스 로
덴마크 미디어 그룹 에그몬트의 대형 시계가 독특한 인상을 남기는 뵈운마이어가데 거리에서 루이스 로 갤러리의 정갈한 사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와 나란히 자리한 카페 ‘더 로 바’ 앞 벤치에 앉아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여유롭다. 덴마크 출신 디자이너 루이스 로 앤더슨이 2018년 문을 연 이곳은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아방가르드 감성의 홈 퍼니싱 제품과 수공예 미가 깃든 오브제를 소개한다. 그는 초기 아르데코, 브루탈리즘, 바우하우스의 양식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무용수의 실루엣에서 연상되는 시적인 이미지나 건물의 지붕과 석고 난간처럼 일상의 면면에서 영감을 얻어 시대를 초월하는 창조력을 뽐낸다.

타블로
루이스 로 갤러리 근처, 건물로 둘러싸인 란데메르켓 10번지의 안뜰은 유니크한 야외 전시장이 된다. 코펜하겐에서 꽃집, 콘셉트 스토어, 갤러리를 운영하는 다학제적 스튜디오인 타블로는 꽃, 오브제, 인테리어 디자인을 융합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웃인 루이스 로와 협업해 ‘프로젝트 마테리아’ 전시를 기획했다. 8명의 디자이너 및 예술가를 불러 모아 ‘청동, 대리석, 유리’라는 세 가지 재료만을 활용해 창작물을 만들었다. 디지털 아티스트 안드레스 라이징어는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하는 오브제 시리즈를 공개했다. 루이스 로 앤더슨의 유리 화병 ‘암포라’는 400㎜ 높이의 길쭉한 타원형에 내부의 기포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물의 흐름을 연상시켰다.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라우리즈 갈레의 ‘멜드 피시즈’는 물고기들이 얽혀 있는 형태의 오브제 겸 테이블이 눈을 사로잡았다. 삭막한 건물들 사이, 모두에게 열린 전시는 예상치 못한 귀한 발견이었다.
헬레 마르달 스튜디오헬레 마르달 스튜디오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같은 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유리 컬렉션을 선보였다. 알록달록 풍부한 컬러와 유기적인 형태미는 유쾌한 감정을 극대화하며 일상에 활기찬 에너지를 전한다. 특히, 마우스 블론 기법으로 제작 시 발생하는 불규칙성은 오히려 사물의 유일무이한 가치를 드높인다. 헬레 마르달은 “기능성은 작업의 핵심 요소지만 자유로운 형태를 도입하는 것은 예기치 않은 것들을 탐구할 절호의 기회”라며 “결과물이 미묘하게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은 무궁무진한 해석과 더불어 제품과 사용자 간의 친밀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설명했다. 그가 정성껏 준비한 전시 ‘노스탤지어’에선 언젠가 미래의 수집품이 될 조명, 식기, 화병이 가득했다.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가보와 사적인 이야기가 소중한 것처럼, 삶이 기억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해냈다.

크리스티나 담 스튜디오
2012년, 크리스티나 담은 자신의 이름을 딴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프레데릭스가데 1번지 유서 깊은 디자인 하우스를 배경으로 한다. 덴마크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건축을 전공한 만큼 그의 디자인 언어에는 건축적 면모가 반영돼 있다. 내구성이 뛰어난 오크를 포함한 천연 소재 사용, 단색 팔레트와 간결한 형태, 그리고 디테일을 향한 헌신은 그의 작품을 규정짓는 요소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소재’의 개념은 명확하다. “한마디로 ‘타임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일을 덧칠해가며 계속 사용할수록 매력을 더해가는 마룻바닥같이, 오래된 건물의 일부처럼 어우러지는 목가구는 세월이 흐르며 그 멋이 한층 깊어집니다.”

티나 프레이 디자인·마이코웍스
디자인 하우스에서 나와 ‘위대한 왕의 거리’라는 뜻의 스토레 콩엔스가데 방면으로 조금 걷다 보면, 낯선 이름을 마주한다. 티나 프레이 디자인은 샌프란시스코에 기반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다. 이곳에 임시 쇼룸을 연 티나 프레이는 “와비사비 미학에서 영감을 받은 핸드메이드 감성, 미니멀리즘, 지속 가능한 가치가 스칸디나비안 라이프스타일에 잘 맞는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여행을 통해 다문화적 감각을 녹여낸 그의 제품은 레진, 황동, 스테인리스 스틸 같은 소재에 모난 데 없는 곡선적 형태미로 소박하면서도 개성 있는 서사를 더한다.
덴마크 디자인 박물관 맞은편, 갤러리 묄레비트에는 대니시 컨템퍼러리 디자인을 대표하는 다섯 스튜디오가 모여 지속 가능성과 심미성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미래지향적인 소재 개발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생명공학 기업 마이코웍스가 자체 기술로 탄생시킨 영지버섯 균사체 기반 소재 ‘레이시’와 덴마크 디자인 전통 간의 시너지 효과를 기념하는 컬렉션을 선보인다.
루이스폴센 등 조명 명가 탄생
북반구 국가의 휘게 문화와 얽힌 조명은 인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매개체였다. 오후 1시부터 해가 지는 북반구의 긴 겨울, 덴마크에서 조명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으로 그 역할을 확장해왔다. 유럽권의 각양각색 조명 브랜드가 밀집해 있는 코펜하겐에선 지난 6월 ‘3데이즈 오브 디자인’ 축제가 열려 설치 미술과 신작들을 선보였다.덴마크를 대표하는 조명 회사 루이스폴센은 본사 뒤뜰에 ‘서클 돔 스퀘어(Circle Dome Square)’를 설치했다. 거대한 구조물 속에 마련된 ‘판텔라 램프’는 베르네르 판톤(덴마크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 또 다른 덴마크 브랜드 르 클린트는 120여 년 전 종이 갓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모스그린과 버터밀크 색상의 조명 갓을 선보였다. 종이나 플라스틱 시트를 정교하게 접어 만든 플리츠 디자인은 이 브랜드의 정체성이기도 한데, 신작에도 여전히 이 기법을 적용하고 있었다. 1968년 출시해 지금도 사랑받는 ‘볼 램프’ 제조사 프란센, 태양의 빛과 색, 리듬을 시뮬레이션한 조형물 ‘솔라라’를 선보인 누라 등은 조명에 깃든 덴마크의 장인정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영국 디자이너 리 브룸은 코펜하겐의 아시아 하우스에서 ‘프롬 히어 나우(From Here Now)’ 전을 열었다. 이곳은 옛 해운회사의 본거지였다. 조명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상자와 부드러운 천이 함께 설치돼 전시장 자체가 보물선의 보석을 찾는 듯한 느낌을 줬다. 브룸은 이곳에서 휴대용 조명 ‘샹트(chant)’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1970년대 건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풍스러운 유리블록이 샹트의 모티프가 됐다고. 독일 브랜드 오키오는 신제품 대신 ‘오키오의 색채’를 발표하며 공간 속 빛의 존재를 다시 정의하고자 했다. 18가지 색을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는 취지였는데, 오키오는 내년부터 주요 시리즈에 이를 적극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보라/민지혜 기자
코펜하겐=유승주 아르떼 객원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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